수신인은 마리아 코스웨이라는 여인이었다. 영국계 부모를 둔 이탈리아 태생 코스웨이는 당시 예술계에서 제법 알아주는 화가이자 음악가였다. 제퍼슨은 그해 초 파리에서 그녀를 처음 만난 뒤 상사병을 앓아 왔다. 평소 열정이 너무 많았던 탓인가. 아내 무덤의 흙이 마르기 전에 다른 여인에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의 나이 43세였다.
연애편지에 나타난 제퍼슨은 ‘지구상에서 가장 불행한 존재’였고, 감성과 이성의 갈등 속에 끊임없이 고민하는 불쌍한 남자였다.
그는 각자의 행복을 위해 서로 물러서는 것이 최선이라는 편지를 보냈다가도, 억누를 수 없는 그리움을 가득 담아 그녀를 애타게 갈망한다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더구나 당시 제퍼슨은 흑인 여성 노예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후손은 한참 뒤 제퍼슨의 후손을 상대로 친자 확인 소송을 제기해 유족의 자격을 인정받았다.
독립선언문에 ‘생명과 자유, 행복의 추구’라는 천부인권을 명시하는 등 자유민주주의 확립에 큰 족적을 남겼고,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 당대를 풍미한 정치가도 인간의 욕망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적지 않은 사람이 행복의 적절한 추구와 제도 사이에서 어쩔 수 없는 줄타기를 한다. 평생을 쌓은 명예와 사회적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술적 동지’를 만드는, 결과적으로 어리석은 행동을 하기도 한다.
행인지 불행인지 제퍼슨은 3년 뒤인 1789년 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바쁜 정치 일정 등을 소화하느라 편지를 쓰는 횟수가 줄어들게 된 것이다. 그 사이에 코스웨이를 향한 열정도 다스릴 수 있었다.
그는 마지막 편지에서 그녀에 대한 갈망보다는 자신의 과학적인 연구 성과 등을 설명하는 데 더 많은 부문을 할애했다. 남편을 여읜 코스웨이는 같은 해 이탈리아로 가 어린 여학생들을 위한 수녀원을 연다.
제퍼슨은 1790년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 시절 초대 국무장관에 취임하고, 1793년에는 오늘날 민주당의 기원이 된 민주공화당을 창당해 당수가 된다. 1800년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1804년 재선에 성공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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