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의 마지막 장면. 주인공 데미안은 죽음을 앞둔 새벽, 애인에게 보내는 최후의 편지에 그렇게 쓴다. 그리고 곧 눈물범벅이 된 형 테리의 명령에 따라 총살된다.
조국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에 투신해 피 보다 진한 동지애를 나눴던 형제. 이들은 192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난 뒤부터 다른 길을 간다. 형은 폭력 투쟁을 접고 국가 재건을 꾀하는 아일랜드 자유국 군대로 옮기지만 데미안은 아일랜드공화국군(IRA)에 남아 무장투쟁을 고집한다. 북쪽 6개 주가 아직 영국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서.
1인치 모자라는 자유까지 되찾아야 한다는 구교도와 영국 통치를 수용하는 북부 신교도간의 기나긴 갈등은 그렇게 시작됐다. 북아일랜드에서 차별받던 구교도들이 1969년 폭동을 일으키면서 갈등은 내전으로 번졌다. 양측의 무차별 테러로 3700여 명이 희생됐다.
피가 피를 부르는 내전을 겪으며 이들이 진정 원하는 건 평화임을 깨닫기까지는 25년의 세월이 걸렸다. 1994년 10월 13일 신교도 무장조직은 IRA에 대해 휴전을 선언했다. 몇 주 전 IRA가 밝힌 화해 메시지에 대한 응답이었다. 앨버트 레이놀즈 당시 아일랜드 총리는 “우리 역사에서 비극의 페이지가 넘어가는 순간”이라며 휴전 합의를 반겼다.
2년 뒤 IRA가 저지른 런던 폭탄테러 때문에 고비가 있긴 했으나 1998년 신교파와 구교파는 결국 평화협정을 맺었다. 그해 양측을 중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데이비드 트림블 영국 상원의원은 “분쟁은 한 쪽이 다른 쪽에 ‘완전한 승리’를 추구해선 결코 해결될 수 없다”고 말했다.
양측이 뿌린 화해의 씨앗은 올해 5월 8일 양측 지도자들이 북아일랜드 공동 자치정부를 출범시키면서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 신교도인 민주연합당 이언 페이슬리 당수가 수석장관을, 구교도인 신페인당 마틴 맥기니스 부당수가 차석장관을 맡는 방법으로 권력을 나눠가졌다.
데미안이 형과 총부리를 겨누면서까지 쟁취하려 했던 ‘완전한 독립’. 데미안은 평소 아끼던 후배가 조직을 배신하자 그를 직접 총살하며 “조국이란 게 정말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는 거겠죠”라고 자문하듯 다짐한다. 평화를 희생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가치란 과연 뭘까.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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