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임 기간 그는 인기 있는 대통령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켰지만 일본에 떨어뜨린 원자폭탄 탓에 ‘Give 'em Hell Harry(엿 먹인 해리)’라는 악명이 따라붙었다.
나라 밖에선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플랜’을 추진하며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지만, 국내에선 전후(戰後) 후유증 앞에 무력했다.
게다가 시골 출신에 변변한 대학 졸업장도 없던 트루먼은 정치적 입지도 탄탄치 못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부통령에 취임한 지 82일 만에 그야말로 얼떨결에 대통령이 된 그였다.
그런 그가 재선에 출마했을 때 그의 승리를 점치는 이는 드물었다. 당시 대통령 트루먼에 대한 국민적 지지율은 30%대. 역대 최저 수준이었다.
지지 기반인 민주당조차 트루먼을 외면했다. 어차피 질 선거였다.
하지만 1948년 11월 2일 뚜껑을 연 결과는 트루먼의 압승이었다.
유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건 트루먼의 서민적 행보와 저돌성이었다.
선거 자금도 동원하지 못한 트루먼은 기차로 미국 전역을 돌며 군중 연설을 했다. 3만5000km가 넘는 대장정이었다. 트루먼은 열차 맨 뒤 칸에 자리를 잡고 기차가 정거장에 머물 때마다 즉흥 연설을 펼쳤다. 역사상 유례없는 이 광경을 직접 보기 위해 수십만의 군중이 역사(驛舍)로 몰렸다.
그 유명한 ‘휘슬 스톱(whistle stop)’ 유세였다.
강한 인상을 남긴 덕에 유권자들의 마음은 트루먼에게로 옮겨 갔지만 그 누구도, 트루먼 자신조차 이런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당시 분위기는 ‘시카고 트리뷴’이 개표가 끝나기도 전에 ‘듀이(공화당 후보)가 트루먼을 꺾었다’는 1면 머리기사로 역사적 오보를 낼 정도였다.
그의 두 번째 임기도 평탄치는 않았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됐고, 1950년엔 6·25전쟁이 발발했다. 특히 6·25전쟁 참전으로 그의 지지율은 20%대로 뚝 떨어져 역대 최악의 대통령으로 꼽혔다.
하지만 퇴임 후 트루먼의 입지는 달라졌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용기 있는 결정을 내린 지도자로 재평가됐다. 트루먼은 43명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유능한 대통령으로 꼽힌다. 170cm가 안 되는 작은 체구 탓에 ‘little man(리틀맨)’으로 불렸던 그는 이제 ‘little big man(작은 거인)’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강혜승 기자 fined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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