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자니 적어도 반나절은 투자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간이 아깝다. 겉만 보고 가자니 두고두고 아쉬울 것 같아 찜찜하다. 결국 다른 볼거리를 포기하고 들어가도 또 다른 딜레마에 빠진다. 전시 규모가 방대해서 어디부터 볼지 선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박물관의 대명사인 루브르가 처음부터 지금의 용도로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12세기 센 강가에 처음 지어질 당시의 루브르는 요새였다. 규모도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작았으며 어둡고 칙칙했다.
15세기 말 ‘프랑스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랑수아 1세 때 루브르는 궁전으로 탈바꿈을 시작했다. 뒤를 이은 왕들도 경쟁하듯 건물을 추가로 지었고 안팎을 조각, 그림, 태피스트리로 장식했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이탈리아인 건축가를 불러들여 호화로움을 더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 뒤 루브르에 대한 관심을 거둬들였다. 1672년 한층 더 화려한 베르사유궁이 완공됐기 때문이다. 이후 왕들은 베르사유를 거처로 삼았고 루브르는 방치됐다.
1789년 7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의 운명을 뒤바꾼 혁명은 루브르의 운명도 바꿔 놓았다.
날마다 계속되는 베르사유궁의 호화 파티에 분노했던 파리 시민들은 그해 10월 루이 16세를 루브르로 데려갔다. 다시 왕의 거처가 된 것도 잠시. 1792년 루이 16세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자 루브르는 혁명 세력의 차지가 됐다.
이보다 앞선 1791년 이미 혁명정부는 루브르를 ‘과학, 예술의 모든 기념물을 모으는 장소’로 지정했다. 1793년 11월 8일 루브르는 ‘중앙 예술 박물관’이란 이름 아래 대중을 위한 장소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박물관이 문을 연 뒤 혁명군은 이웃 나라와의 전투에서 획득한 전리품들을 루브르로 가져왔다. 이후 권좌에 오른 나폴레옹은 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승리를 거듭하며 점령지에서 가져온 유물로 루브르를 한층 살찌웠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은 35만여 점에 이른다. 고대 이집트 유물에서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와 문화가 모여 있다.
프랑스인들에게 루브르는 문화대국으로서의 자존심을 대표한다. 무엇보다 ‘수많은 왕궁 가운데 하나’로 남을 수도 있었던 곳을 대중에게 선사한 조상들의 혜안 덕분이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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