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적 재앙이 벌어졌지만 중앙정부는 무능했다. 미국 경제의 토대인 자유방임과 지역분권주의가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금융시장의 조기경보 체계는 말할 것도 없고 감독 기능조차 없었다.
정부가 허둥대는 동안 ‘미국 금융계의 황제’였던 존 피어폰트 모건 1세(JP모건)가 나섰다. 그는 대형 은행들을 압박해 투신사에 현금 지원을 하도록 했고 뉴욕증권거래소에 긴급 자금을 투입했다. 공무원에게 봉급을 줄 돈마저 없었던 뉴욕 시에도 연리 6%의 수익채권을 발행토록 한 뒤 이를 은행이 사들이게 했다.
사태가 수습된 뒤 미국은 중앙은행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공황의 발생 주기가 갈수록 짧아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은행은 철저한 상업적 집단이며 공익성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모건의 경고는 언제라도 등을 돌릴 수 있다는 ‘샤일록’의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의회는 우여곡절 끝에 중앙은행 설립 규정을 담은 연방준비제도법안을 통과시켰고, 1914년 11월 16일 드디어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출범했다.
초기의 FRB는 지금처럼 강력한 통제력을 갖지 못했다. 12개 지역연방은행은 지점이 아니라 독립적인 중앙은행처럼 행세했다.
실수도 속출했다. 주가 상승기였던 1927년에는 금리를 내렸고, 경기가 침체 기미를 보였던 이듬해에는 금리를 3번이나 올렸다. 1929년 대공황이 벌어졌을 때는 달러화 가치를 유지하고 금본위제를 고수하는 정책을 펴다 국제 금융시장을 마비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호된 신고식에도 불구하고 FRB는 미국 경제의 성장, 정부로부터의 철저한 독립, 고집스럽게 쌓아온 시장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유럽의 중앙은행들을 압도하는 금융시장의 조정자로 떠올랐다.
주식시장은 FRB 의장의 입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FRB 산하 금리 결정기구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열리는 날에는 각국의 중앙은행장들이 숨을 죽인다. 지난해 퇴임한 앨런 그린스펀 전 FRB 의장의 발언은 ‘그린스펀 효과(Greenspan effect)’로까지 불리기도 했다. 역대 한국은행 총재의 발언은 ‘효과’를 낳은 사례가 많았을까, 아니면 ‘충격(shock)’을 더 많이 주었을까.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