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군의 공적(公敵)인 일본에 대한 처리도 의제에 들어가 있는 만큼 이 자리에서 조선 독립이 논의되는 것이 당연한 듯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시점은 1938년으로, 조선이 일본의 영토로 편입된 1910년에서 28년여가 지난 때였다. 카이로 회담을 마련한 연합국의 목표는 2차 대전 이전으로 세계를 되돌리는 것이었다. 실제로 종전 이전 영국이나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나 인도는 모두 독립 논의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런 상황에서 연합국 측에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이해시킨다는 것은 어려웠다.
더욱이 영국이나 미국은 애초 한국을 일본에서 떼어 놓는다 해도 신탁통치를 할 생각이었다. 회담 전, 처칠 총리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서 종전 후 한국에 완전 독립을 승인하지 않고 신탁통치를 한다는 내용의 합의를 이끌어낸 사실이 ‘시카고선’지에 보도되기도 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한국의 독립 문제를 집중적으로 이슈화한 인물은 장제스 총통이었다. 그는 후반부로 예정된 한국 관련 논의를 앞당겼고, 한국의 독립 보장 약속을 선언에 포함시키자고 기습적으로 제안했다. 한국 독립에 냉담했던 영국과 미국이었지만 아직 건재한 태평양 전선의 일본을 상대하려면 중국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다.
결국 11월 27일 발표된 카이로선언에는 “한국민이 노예 상태에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할 것을 결의한다”는 특별조항이 삽입되어 대한민국의 독립에 대한 국제적 보장을 확인받을 수 있었다. 최근 발굴된 중국 자료 ‘총재접견한국영수회담기요(總裁接見韓國領袖會談紀要)’에 따르면, 카이로 회담을 앞두고 1943년 7월 26일 장제스는 김구의 요청에 응해 김구 김원봉 등 6명과 비밀리에 만났다. 이들은 종전 후 한국의 완전 독립을 쟁취할 수 있도록 중국 측에 지지와 지원을 요청했다.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를 ‘빚’으로 생각해 온 장제스가 “중국 측은 힘써 싸우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 문서의 요지.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들 계십시오”라고 남겼던 윤봉길의 결의는 11년 만에 빛을 본 셈이었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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