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두 달이 지나지 않은 12월 12일. 백제 장인의 놀라운 솜씨를 고스란히 담은 백제금동대향로(국보 287호)가 땅속에 파묻힌 지 1300여 년 만에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최초로 발견된 백제시대 대형 향로였다.
애초 부여군은 이곳에 주차장을 만들려 했다. 발굴단은 혹시 있을지 모를 유구(遺構·옛 건축물의 자취)를 확인하기 위해 시굴 조사를 했다. 당장 주차장 건설 공사를 중단시킬 만한 결정적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그러나 왠지 예감이 이상했다. 발굴단은 생각했다. “딱 한 번만 파 보자.” 발굴을 위해 파 들어간 구덩이는 물기로 질퍽거렸다. 12월의 추위까지, 최악이었다. 손이 시리고 부르텄지만 흙을 파고 또 팠다. 물구덩이에서 뚜껑 같은 게 보였다. 예사롭지 않았다. 새벽 내내 전등을 밝히고 파냈다.
“와!” 어찌나 화려하던지 중국 한나라의 향로인 박산로(博山爐)가 아닌가 하는 얘기도 나왔다. 이물질을 닦아 내자 드러난 자태는 믿기지 않을 만큼 완벽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뚜껑 꼭지는 봉황이 여의주를 턱 밑에 괴고 날아가는 모습. 뚜껑 위는 악사 5명이 금(琴) 완함(阮咸) 등 악기를 연주하는 형상이다. 실제로 연주하는 듯 생생한 표현이 일품. 신선이 사는 전설 속 봉래산을 묘사한 뚜껑엔 호랑이 코끼리 등 온갖 동물이 조각돼 있다. 개를 데리고 산길을 유유히 산책하는 사람 등 인물 조각도 살아 숨쉰다. 몸체는 막 피어나는 연꽃 모양. 몸체 아래 받침대는 용이 하늘을 향해 꿈틀거리며 오르는 형상이다.
열흘 뒤인 12월 22일. 1300여 년 전 생활과 자연을 현대에 되살린 백제인의 독창적인 예술감각이 공개됐다. 다음 날 주요 일간지 1면 톱기사를 장식했다. 1994년 4월 국립중앙박물관은 이 유물 하나만을 위한 특별전시회를 열었다. 유례없는 일이었다. 전시 기간 12일 동안 찾아온 관람객만 6만8000여 명이었다.
후손의 제사상을 받은 백제 왕자의 혼이 사라질 뻔한 백제 정신을 지킨 것은 아닐까. 기본 좋은 상상을 해 본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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