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 전 총리는 1974년 퇴임한 뒤에도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일본 정계를 막후에서 지배해 왔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결국 몰락했다. 그는 1976년 7월 역대 총리 중 최초로 검찰에 구속됐고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최고재판소 확정판결이 나오기 2년 전인 1993년 뇌경색으로 사망해 다행히(?) 감옥에 가진 않았다. 그 대신 다나카 전 총리가 죽기 전에 남겼다는 ‘정치는 돈과 머릿수’라는 말은 금권정치를 상징하는 표어가 됐다.
록히드사건은 우연한 계기로 세상에 알려졌다. 1975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는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부정 선거자금 의혹을 캐기 위해 주요 기업들의 해외 계좌를 조사했다. 그 과정에서 증권거래위는 록히드사가 조성한 거액의 비자금이 엉뚱하게도 일본 관료들의 계좌로 흘러간 사실을 알게 된 것. 닉슨을 향했던 화살이 다나카를 맞힌 셈이다.
퇴장은 불명예스러웠지만 다나카 전 총리만큼 국민의 사랑을 받은 정치인도 드물었다. 니가타(新潟) 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고학으로 공고 토목과를 졸업한 그는 태평양전쟁의 와중에 토목공사를 벌여 재산을 모았다. 그 재력을 기반으로 1947년에 정계에 진출해 1972년 총리가 됐다. 다나카 전 총리의 성공신화는 비천한 신분을 극복하고 일본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비견됐다. 또 건설사 최고경영자(CEO) 경험에서 나온 추진력과 빠른 판단력으로 ‘컴퓨터가 붙은 불도저’라는 애칭도 얻었다.
이 사건으로 다나카 전 총리는 몰락했지만 그를 구속한 도쿄지검 특수부는 일본인이 가장 신뢰하는 기관이 됐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이토 시게키 전 검사총장이 말해 유명해진 ‘거악(巨惡)’을 넘어뜨림으로써 정치권의 예속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지난해 한국에서도 개봉된 ‘히어로’의 ‘구류 고헤이’라는 검사(기무라 다쿠야)의 역할도 일신의 영달을 돌보지 않고 거악의 정치인과 맞서는 것이었다. 이 영화가 일본에서 공전의 히트를 친 것도 ‘록히드 스캔들’의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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