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체스 영웅 가리 카스파로프는 1996년 2월 10일 또 다른 기록에 도전했다. IBM의 슈퍼컴퓨터 ‘딥 블루(Deep Blue)’를 상대로 체스계의 지존을 가리기로 한 것.
아제르바이잔 출신인 카스파로프는 체스계의 전설이었다. 7세 때 체스를 배우기 시작해 15세에 옛 소련의 최연소 체스 챔피언이 됐고, 22세에는 최연소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1500년 체스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카스파로프는 1989년 처음으로 체스 컴퓨터 ‘딥 소트(Deep Thought)’와 겨루어 가볍게 이긴 전력이 있다. 그러나 이번 승부는 딥 소트 때와는 달랐다. 경기 시간이 최장 7시간까지 허용되는 정규 경기 방식으로 맞붙은 것이다.
초당 1억 개의 수를 계산해 내는 딥 블루는 딥 소트를 개발한 카네기멜런대 연구팀과 IBM의 기술진이 합작해 만들었다. 딥 소트의 ‘딥’과 IBM의 별칭인 빅 블루(Big Blue)의 ‘블루’를 결합해 지은 이름이다.
6경기 중 첫 경기가 끝나자 세계는 물론 카스파로프도 놀랐다. 딥 블루가 카스파로프를 이긴 것이다. 체스 경기에서 인간의 두뇌가 인공 지능에 무릎을 꿇기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카스파로프가 한 수 위였다. 그는 남은 경기에서 3승 2무를 기록해 최종 승자가 됐다.
이듬해 5월 딥 블루는 ‘디퍼(Deeper) 블루’라는 애칭을 얻으며 한층 업그레이드돼 카스파로프에게 다시 도전장을 내밀었다. 첫 경기는 카스파로프가 이겼지만 최종 승자는 2승 1패 3무를 기록한 디퍼 블루였다.
‘인공 지능과의 대결에서 처음 패배한 자’ 카스파로프는 설욕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2003년 2월 ‘딥 주니어’와의 대결에서 1승 1패 4무를 기록한 채 2005년 3월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 카스파로프는 “체스를 두며 내리던 의사결정을 다른 분야에 적용해 보고 싶다”며 정계에 투신해 민주화 투사로 변신했다. 지난해 9월 그는 야당 ‘다른 러시아’ 전당대회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
하지만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집권 연장 반대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연행됐고 푸틴 대통령의 집요한 방해 공작에 무릎을 꿇어 12월 12일 대선 후보 사퇴를 선언했다. 그가 정치인으로서 설욕의 기회를 갖게 될지 다음 ‘경기’가 기다려진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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