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2월 21일자 동아일보 사회면에 실린 마라톤 영웅 남승룡 선생 부고기사의 제목이다. 전날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동메달리스트인 남승룡 선생에 대한 함축적인 표현이었다.
고인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2시간 29분 19초) 선생과 영국의 어니스트 하퍼(2시간 31분 24초)에 이어 2시간 31분 42초로 3위를 차지했다. 조선 남아 2명이 올림픽 마라톤에서 1, 3위를 차지한 것은 일제의 강압 속에서 조선인의 기개를 세계만방에 떨친 쾌거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동메달은 잘 기억해 주지 않았다. 남 선생은 손 선생과 함께 올림픽 동메달을 따낸 마라톤 영웅이었지만 그의 이름 석 자를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세상을 떠나던 해 1월 12일 혼수상태로 서울 송파구 가락동 경찰병원에 입원해 한 달이 넘게 사경을 헤맸지만 이런 사실은 별세한 날인 20일 아침 동아일보를 통해서 처음 알려질 정도로 아무도 그의 행방을 모르고 있었다.
1912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영원한 마라톤맨이었다. 보통학교 6학년 때 전남 대표로 조선신궁대회에 출전해 1만 m에서 4위, 마라톤에서 2위를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양정고보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고 메이지대 재학 중이던 1936년 초 일본 1차 선발전에서 양정고보 1년 후배 손 선생을 제치고 우승해 대표로 선발됐다. 남 선생은 베를린에서 당시 대표 선수 3명 가운데 조선인 선수가 두 명이나 출전하는 것을 꺼렸던 일본육상연맹이 독일 현지 테스트를 하는 등 온갖 출전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실력으로 출전해 3위에 올랐다.
남 선생은 1947년 코치로 참석한 보스턴 마라톤 때 서윤복의 페이스메이커로 달려 서 선수를 우승시키고 자신은 10위로 골인할 정도로 마라톤에 대한 애착이 컸다. 그러나 늘 손 선생의 그늘에 가려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잊혀진 영웅’이 됐다.
남 선생이 사망했을 때 부인 소갑순 씨와 막내딸 순옥 씨는 “1등과 3등의 차이는 엄연한 사실이고 1등이 우대받는 것은 당연했다”면서도 “3등으로 인해 느꼈던 서글픔도 컸다”고 말했다. 이제는 3등의 가치도 되새겨보는 것은 어떨까.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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