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대결’로 불린 무하마드 알리와 조 프레이저의 헤비급 챔피언전으로 두 선수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 그때까지 알리는 31전 전승 26KO승, 프레이저는 26전 전승 23KO승으로 모두 무패를 기록하고 있었다.
알리는 당시 베트남전 징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3년 반 동안 타이틀과 함께 선수 자격을 박탈당한 뒤 2차례 복귀전에서 승리한 끝에 프레이저에게 도전한 것.
알리와 프레이저의 대결은 1960년대 미국 사회의 분열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알리는 전쟁과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진보 진영의 상징이었다. 반면 과묵하고 성실한 프레이저는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보수적인 장년층의 지지를 받았다.
‘떠버리’ 알리의 입은 이 대결을 앞두고도 쉬지 않았다. 그는 프레이저를 ‘백인의 챔피언’으로 낙인찍었고 프레이저를 응원하는 흑인은 배신자라고 했다. 프레이저를 ‘엉클 톰’ ‘고릴라’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또 알리는 상대방을 6라운드에 때려눕히겠다고 예언했다.
말솜씨가 부족한 프레이저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다. 그 대신 알리를 반드시 눕히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경기는 초반부터 난타전으로 펼쳐졌다. 알리는 화려한 워킹과 잽으로 상대를 곤혹스럽게 했다. 하지만 프레이저는 저돌적으로 밀고 들어가며 육중한 펀치를 날렸다. 알리가 상대를 눕히겠다고 예언한 6라운드가 지났을 때 오랜 공백기를 거쳤던 알리는 이미 지쳐 있었다.
알리는 이후 펀치로는 프레이저를 막지 못했다. 그는 맷집과 입으로 프레이저에게 저항했다. 15회엔 프레이저의 왼손 훅이 알리의 오른 턱에 제대로 걸렸다. 알리의 프로 데뷔 이후 첫 다운이었다. 알리가 일어나긴 했지만 심판 전원일치 판정패를 피할 순 없었다.
그러나 패배자 알리의 신화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알리는 ‘그저 한 경기를 졌을 뿐’이라고 담담해했다. 그는 1974년과 75년 프레이저와 재대결을 펼쳐 두 경기 모두 이겼고 헤비급 타이틀을 두 번 더 차지했다.
그는 자신을 권투선수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퓰리처상 수상자인 노먼 메일러가 알리에 대해 쓴 책 ‘파이트’에서 알리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권투가 아니었다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것을 뛰어넘으려고 내가 권투를 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모른다. 멋있게 보이려고 싸우는 게 아니다. 여러 가지를 바꾸고 싶을 뿐이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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