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한국의 석유 조달 창구는 광복 직후 미군정이 설립한 대한석유저장회사(KOSCO). 이 회사의 주주인 스탠더드오일, 칼텍스, 셸 등 미국의 3대 석유 메이저가 유류의 저장과 판매를 독점했다. KOSCO는 휘발유 등 이미 정제가 된 고가(高價)의 완제품을 수입해 팔았다.
정부는 경제개발 계획 발표와 동시에 대한석유공사(현 SK에너지)를 설립했다. 석유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으려면 공기업 주도의 수급 전략이 필요했다. 하지만 기술도, 돈도 없었다. KOSCO의 눈치도 봐야 했다.
고심 끝에 미국의 또 다른 석유 메이저인 걸프를 불러들였다. 드디어 1963년 3월 12일, 걸프로부터 2500만 달러를 끌어 온 대한석유공사는 울산에 국내 최초의 정유공장 건설을 위한 삽을 떴다. 한국 산업화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셈이다.
13개월 뒤 완공된 울산정유공장의 하루 원유 정제 능력은 3만5000배럴. 대한석유공사의 후신인 SK에너지의 현재 생산량이 하루 90만 배럴에 육박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유공장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였다.
하지만 울산정유공장은 꾸준한 시설 투자를 통해 정유업계의 성공 모델로 성장했고, 민간 기업들의 참여로 한국 전체의 원유 정제 능력은 세계 5위권에 이르게 됐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전략적 실수도 있었다. 국내 석유업계가 당장 돈이 되는 정제업 중심으로 편성되다 보니 해외 에너지원 발굴에서 경쟁국보다 뒤졌다. 국가의 엄격한 가격 통제에 길들여진 정유업체들은 유가가 자율화된 뒤에도 담합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 또한 석유제품에 고율의 세금을 물리는 손쉬운 방법으로 재정을 꾸려 온 까닭에 요즘처럼 유가가 급등한 시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일부 실수에도 불구하고 정부 주도의 산업화 전략은 당시로선 최적의 선택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민주주의의 희생을 담보로 한 경제개발이었다고도 하지만 이 역시 논란의 여지는 많다.
고기정 기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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