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쿠바 혁명 이후 두 나라는 ‘가깝지만 먼 사이’가 됐다. 카스트로가 농지 개혁과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면서 쿠바에 진출한 미국 기업의 재산을 몰수했다. 미 정부는 쿠바산 설탕 수입을 금지하는 등 경제 제재로 맞서는 한편, 턱 밑에서 싹튼 ‘혁명의 불씨’를 제거하기 위한 은밀한 계획을 꾸몄다.
1961년 4월 17일 새벽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동남쪽으로 202km 떨어진 피그 만. 2400t급 배 4척이 해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배에는 카스트로 정권에 반대하는 1510명의 중무장한 쿠바 망명자가 타고 있었다. CIA가 니카라과에서 훈련을 시킨 ‘2506여단’이었다.
그들은 수도 아바나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상륙 후 뭔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계획대로라면 공격 전에 괴멸됐어야 할 쿠바 공군은 건재했다. 미국의 개입을 숨기기 위해 미 정부가 약속한 항공 지원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밀리면 산악지대로 후퇴해 게릴라전을 펼칠 요량이었지만, 걸어서 후퇴하기에는 너무 멀었다. 기대했던 현지 반정부 세력이나 주민들의 대응도 없었다. 늪지대에 갇힌 ‘반혁명군’은 115명의 전사자를 내고 항복했다.
‘피그 만 침공’은 미국의 대표적인 외교 실책으로 꼽힌다. 미 정부 내외의 강경파들은 1500여 명으로도 쿠바 정권을 전복시킬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든 것이다.
미국의 개입으로 카스트로의 권력은 오히려 공고해졌다. 그는 자신의 반대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친소련 정책을 폈다. 이는 세계를 ‘3차 대전의 공포’로 몰고 간 쿠바 미사일 위기로 이어졌다. 카스트로도 반미 감정을 이용해 49년 동안 장기 집권하고 올해 2월에야 동생인 라울에게 권좌를 물려주었다.
미 심리학자 어빙 제니스는 의사결정권자들이 지나치게 동질적일 때 피그 만 침공처럼 ‘집단 사고(Group thinking)의 희생양’이 나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무(無)오류의 환상과 비판에 대한 자기합리화가 그릇된 판단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집단 사고의 덫’은 우리 삶에 늘 도사리고 있다. ‘뭔가에 홀린 듯한’ 오판을 반복한다면 먼저 주위부터 돌아볼 일이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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