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3월 19일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 집. 특사(特使) 교환을 위한 남북 실무대표들이 만난 자리에서 북측 박영수 단장이 내뱉은 폭언이다. 남측 송영대 대표는 즉각 “회담하러 나온 사람이 전쟁이란 말을 쓸 수 있느냐”며 격분했다.
이날 회담이 순탄할 것이라고는 애초부터 기대하기 힘들었다. 1993년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추가 핵 사찰을 피하기 위해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한 뒤 북-미 관계가 전쟁 직전으로까지 치닫고 있던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회담은 시작한 지 55분 만에 결렬됐고 남북 특사교환도 무산됐다. ‘전쟁 불사’와 ‘서울 불바다’ 발언의 파문은 일파만파로 확산됐다. 당시 미 NBC TV는 미국이 항공모함 2척과 해병 상륙기동부대를 태운 함정 등 30척의 군함을 북한으로부터 하루 항해거리에 집결시켰다고 보도했다.
1994년 북한 핵 위기는 같은 해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이 특사로 평양을 방문한 뒤 미국과 북한의 이른바 ‘제네바 합의’로 일단락됐다.
그러나 북한의 ‘불바다’ 발언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2004년 9월 북한 노동신문은 “미국이 (대북) 핵전쟁을 일으키면 주일 미군기지는 일본의 생존을 위협하는 시한폭탄이 되고, 일본 땅을 핵전쟁의 불바다로 만드는 도화선이 될 것이다”고 주장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 후 ‘대북 퍼주기 논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국 정부가 햇볕정책을 고수하는 동안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했다. 그리고 2006년 10월 핵실험이라는 초강경수를 뒀다.
이때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해외 대변인’ 역할을 한다는 재일교포 김명철 조미평화센터 소장의 입에서 ‘불바다’가 튀어나왔다.
그는 국내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만일 (유엔이) 우리(북한)를 제재와 봉쇄로 대하면 우리는 전쟁으로 본다. 전쟁한다는 것은 도쿄도 뉴욕도 불바다가 된다는 것이고, 헛소리인지 아닌지 진짜로 해 보자는 것”이라고 했다.
지난 10년간 ‘햇볕’을 강하게 쪼일수록 불바다 위협은 더욱 섬뜩해졌다. 상당수 북한 전문가가 햇볕정책을 실패한 대북정책으로 평가하는 결정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차지완 기자 c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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