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 24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코닥 극장에서 열린 제74회 오스카상 시상식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트레이닝 데이’의 덴절 워싱턴과 ‘몬스터 볼’의 핼리 베리 두 흑인 배우가 남녀 주연상을 수상한 것. 둘은 유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되던 ‘뷰티풀 마인드’의 러셀 크로와 ‘인 더 베드룸’의 시시 스페이섹을 제쳤다.
특히 베리는 아카데미 시상식 사상 처음 흑인으로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뜻 깊은 기록을 세웠다. 베리는 “이 상은 모든 유색인 여배우들을 위한 상”이라며 “오늘 드디어 문이 열렸다”며 감격했다.
베리는 몬스터볼에서 사형수 남편을 떠나보낸 뒤 하나뿐인 아들마저 교통사로로 잃은 흑인 여성 ‘레티샤’로 열연해 호평을 받았다. 레티샤는 남편의 사형을 집행한 퇴역 교도관인 백인 남성과 사랑에 빠지는 얄궂은 운명을 소화해냈다.
1968년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백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베리는 미인대회에 입상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1991년 ‘정글 피버’, 1992년 ‘부메랑’, 1994년 ‘고인돌 가족 플린스턴’에 조연으로 출연했고 2000년 ‘엑스맨’에서 안개와 번개 등을 부리는 ‘스톰’ 역을 열연하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베리는 2004년 찍은 ‘캣우먼’으로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매년 최악의 작품과 영화인을 뽑는 시상식)에서 최악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007시리즈 제20탄 ‘어나더데이’(2002년) ‘퍼펙트 스트레인저’(2007년) 등에 출연하며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인 날’ 이후 영화계에서 흑인에 대한 차별은 나아졌을까.
베리는 지난해 한 언론에서 “오스카상은 탔지만 큰 변수가 못 됐다. 피부색 때문에 배우로서의 능력까지 의심하는 영화 관계자들을 설득하느라 스튜디오를 찾아가 일일이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게 서글프다”라고 말했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미국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은 첫 흑인 대통령에,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은 첫 여성 대통령에 도전하고 있다. 과연 이들의 꿈은 이뤄질 수 있을까.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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