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언론은 스페인의 학정과 스페인군의 잔혹함을 널리 알렸고 이를 통해 참전의 정당성이 힘을 얻어갔다. “새로운 시장이 필요하다”면서 기업인들도 거들었다. 여기에 종교인들도 가세해 “가톨릭의 쿠바를 개신교로 개종시켜야 한다”면서 참전을 촉구했다.
이 같은 분위기는 당시 미국 내에 팽배했던 소명론에 힘입은 바 크다. 이것은 19세기 중엽 이래 미국인은 신으로부터 새로운 땅을 개척하라는 소명을 부여받았다는 믿음이다. 이 소명론은 미국이 캐나다 멕시코 쿠바까지 합병해야 한다는 팽창주의의 정신적 근거로 활용됐다.
이 와중에 1898년 2월 15일, 쿠바 아바나 항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메인호에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전함에 타고 있던 미군 260명이 목숨을 잃었다. 정확한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미국인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많은 미국인은 폭발 사고가 스페인 군인들의 소행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참전 분위기가 더욱 무르익어갔다. 미국 정부와 의회는 본격적으로 참전을 논의했고 미국 군대는 서서히 쿠바를 봉쇄해 들어갔다.
그런데 선제공격을 시작한 것은 스페인이었다. 봉쇄와 압박이 가해지자 스페인은 궁지에 몰리지 않을 수 없었고 오히려 선제공격으로 돌파구를 찾으려 했던 것이다.
1898년 4월 24일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이 시작됐다. 그러나 전쟁은 3개월 만에 미국의 일방적 승리로 막을 내렸다.
전쟁이 끝나고 그해 12월, 전쟁 뒤처리를 위한 파리조약이 체결됐다. 파리조약에 따라 쿠바는 스페인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을 되찾았다. 스페인이 지배해오던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는 미국의 영토로 복속시켰다. 남북전쟁이 끝난 지 20여 년 만에 세계 최대의 산업국으로 성장하던 미국. 이 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강대국으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굳혔다.
많은 것을 얻은 미국과 많은 것을 잃은 스페인. 새로운 제국 미국과 황혼의 제국 스페인의 명암이 극명하게 엇갈린 전쟁이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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