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명에 취미가 있던 그는 사업가로도 성공했다. 1913년 일람식 카드색인 시스템을 발명해 특허를 땄고 회사를 차려 큰돈을 벌었다. 아내, 누이 돈까지 끌어들여 자신이 세운 회사의 주식을 사들였다. 주가 전망에 일가견이 있던 피셔는 1929년 10월 14일 투자자들이 참석한 모임에서 “이미 주가는 영원히 지속될 높은 고원(高原)에 이르렀다”고 공언했다.
열흘 뒤 그의 명성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검은 목요일’이라 이름 붙여진 같은 달 24일 미국의 대공황이 시작됐다. 다우존스평균주가는 이날 하루 30% 이상 폭락했다.
한 달이 지난 뒤에도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회복이 멀지 않았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이후 3년간 주가는 10분의 1로 하락했다.
피셔의 회사는 망했고 그는 1000만 달러의 손해를 봤다. 그가 계속 강의할 수 있도록 은행에 저당 잡힌 그의 집을 예일대가 사들여 그에게 다시 빌려줘야 할 정도였다. 1947년 4월 29일 타계할 때까지도 피셔의 명성과 경제적 어려움은 회복되지 않았다.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존 갤브레이스(1908∼2006)는 1954년 펴낸 ‘대폭락, 1929’라는 책에서 “당시 피셔같이 저명한 학자도 황당한 발언으로 투기를 부추겼다”고 썼다. 이 글 때문에 피셔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경제학자’의 표본으로 더욱 희화화됐다.
하지만 피셔는 ‘계량경제학의 창시자’로 불리며 경제학계 안에서는 지금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수학자이기도 했던 그가 고안한 이자, 화폐에 관한 이론들은 현대 경제학 교과서에 반영돼 있다. 밀턴 프리드먼 등 통화주의자들은 그의 이론을 계승, 발전시켰다.
공교롭게 갤브레이스는 피셔 사후 59년 뒤 같은 날 타계했다. 그에 대해 현재 최고의 경제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검증되지 않은 진단을 내놓고, 복잡한 경제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단순하게 대답한 정책 기업가(policy entrepreneur)”라고 깎아내렸다. 한 인간, 특히 경제 문제를 다룬 사람에 대한 평가는 살아 있을 때나, 죽은 뒤에나 이렇게 쉽지 않은 법이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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