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87년 광양제철소 1기 준공

  • 입력 2008년 5월 7일 02시 54분


“너 인마, 왜 말도 안 되는 것을 박태준 사장한테 보고해서 이미 결정된 아산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하게 만드는 거야.”

1980년 6월 20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건설분과위원회 사무실.

포항제철(포스코) 유상부 설비계획1부장이 불려와 건설부 관계자로부터 혼쭐이 나고 있었다. 말대꾸를 하던 유 부장은 급기야 멱살까지 잡혔다.(‘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이장규 지음)

건설부에선 제2제철소 터로 일찌감치 충남 아산을 잡아놓았다.

박태준 포철 사장은 직원들에게 아산의 토질조사를 지시했다. 하지만 정작 땅을 파 보니 실망이었다. 모래라고 생각한 곳은 뻘이고, 바위라고 예상한 곳은 부스러지기 쉬운 풍화암이나 편마암이었다. 포철은 내부적으로 전남 광양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광양은 바다 위였다. 지반은 연약했다. 바다 위에 지어야 하는 공장인 만큼 포항과는 공법이 180도 다를 수밖에 없다. 1980년 12월 19일 포철 선발대가 광양 벌교여관에 도착했다.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김 장수로 위장을 하고 현장을 조사했다.

시추작업 또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현장조사 작업에 참여했던 미국 D&M의 슈퍼바이저인 게리 슈트 박사는 “악어가 우글거리는 나이지리아 늪에서도 일해 봤지만 이곳보다는 나았다”고 하소연했다. 국내 건설 사상 처음으로 바다 위에 제철소를 짓기 위해 이들은 매서운 겨울바다와 싸워야 했다.

1981년 11월 4일 청와대회의에서 아산을 최종 후보로 올린 건설부 보고를 받은 전두환 대통령은 “포철 건의대로 광양으로 결정하자”고 포철의 손을 들어주었다. 예상 밖이었다.

광양을 제2제철소 터로 잡은 것은 전두환 정권이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부담을 덜기 위해 정치적으로 배려한 게 아니냐는 시각도 없지는 않지만 사실은 달랐다.

전 대통령의 지시로 안기부가 조사한 결과 아산에서 건설부 공무원들이 사놓은 땅이 드러났다. 하지만 포철 사람들이 광양에 땅을 산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연산 270만 t 규모의 광양제철소 1기 설비는 1985년 3월 5일 착공돼 1987년 5월 7일 준공됐다. 당초 계획보다 6개월 앞당긴 2년 2개월 만이다. 광양 1기 제철소에는 모두 1조6494억 원이 투자됐다. 건설인력은 연인원 720만 명에 달했다.

광양은 제철소가 들어서기 전인 1982년 인구 7만8000여 명의 농어촌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지난해 말 인구 14만여 명의 대표적인 신흥 공업도시로 우뚝 성장했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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