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m 높이의 ‘민주의 여신상’은 마오쩌둥에게 정면으로 맞서기라도 하려는 듯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 있었다. 누구도 선뜻 입을 열어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려 하지 않았다. 광장에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과 함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1989년 5월 30일, 민주화를 요구하며 농성을 계속하던 학생들이 세운 이 여신상은 베이징 중앙미술학원 학생들의 작품이었다. 금속 뼈대 위에 스티로폼과 종이찰흙을 덧붙여 불과 나흘 만에 완성한, 다소 조악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여신상을 보고 미국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떠올렸지만, 학생들이 모델로 삼은 것은 러시아의 혁명적 리얼리즘 조각가 베라 무히나의 거대한 철제작품 ‘노동자와 집단농장의 부녀자’였다.
이미 공산당이 톈안먼 시위를 ‘혼란을 일으키기 위한 계획적, 조직적 반(反)사회주의 운동’으로 규정한 터에 학생들이 자유의 여신상까지 흉내냈다고 한다면 사상적으로 매우 불순한 미국 추종주의 세력으로 몰릴 것은 분명했다. 학생들은 이 여신상을 갈수록 입지가 좁아지는 민주화 운동에 다시금 활기를 불어넣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사실 톈안먼 광장의 학생운동은 5월 말로 접어들면서 시들어가고 있었다. 농성 학생 수는 계속 줄어들었다. 광장은 쓰레기더미와 화장실 악취로 빈민촌처럼 변해 있었다. 일부 학생은 ‘민주주의 투쟁은 이렇게 끝나는 것이냐’고 한탄했다.
학생들의 기대대로 여신상이 제막되면서 광장의 활기는 되살아났다. 전날까지 광장에 모인 학생과 시민들은 1만여 명에 불과했지만 여신상이 세워진 뒤 광장에는 30여만 명이 몰려들었다. 학생들은 이렇게 외쳤다.
“오늘 전 세계에 선언한다. 민주주의는 중국 인민을 일깨웠으며 새 시대는 시작됐다.…민주의 여신상은 석고로 만들어졌고 여기 영원히 서 있을 수 없다. 진정한 민주와 자유가 왔을 때 우리는 영원한 민주의 여신상을 세울 것이다. 그날은 결국 올 것이다.”
하지만 민주의 여신상은 학생들의 예언대로 광장에 오랫동안 서 있을 수 없었다. 불과 닷새 뒤인 6월 4일 새벽 여신상은 인민해방군의 탱크에 짓뭉개져 산산조각이 났다. ‘독재 타도’를 외치는 학생들의 절규와 함께.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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