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4월 어느 날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한 스튜디오에서 17세의 자그마한 금발머리 소녀는 “영화에 출연하면 하루 5달러를 주겠다”는 감독의 제안에 이렇게 당돌하게 답했다.
훗날 ‘영화예술의 아버지’라 불린 데이비드 그리피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무성영화 최고의 여성스타 메리 픽퍼드가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본명은 글래디스 스미스. 1892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나 홀어머니를 도우려고 일곱 살 때 극장무대에 올랐고, 열다섯 살 때 뉴욕에 가서 브로드웨이 무대에 섰다. 2년 뒤 그리피스를 만난 픽퍼드는 매주 한 편씩 10여 분짜리 단편 무성영화를 찍었다.
1912년에 파라마운트의 전신인 영화사의 창립자 아돌프 주커의 출연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후 4년간 21편에 출연하며 픽퍼드는 ‘미국의 연인’으로 떠올랐다. 경쟁자는 찰리 채플린뿐이었다.
1916년 6월 24일 주커와 새 계약에 사인함으로써 사상 최초로 ‘100만 달러짜리 여배우’가 됐다. 이후 자기 영화회사를 차려 수십 편의 영화를 찍었다. 20대 중반이었지만 여전히 영화 속의 역할은 어린 소녀였다.
19세 때 비밀 결혼을 했던 첫 남편과 갈라서고, 액션스타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와 사랑에 빠진 것도 이때쯤이었다. 페어뱅크스와 그의 친구 채플린, 픽퍼드는 1919년 영화 배급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를 세웠고 이듬해 픽퍼드와 페어뱅크스는 결혼했다.
행복은 길지 않았다. 1928년 어머니가 숨진 충격에 그녀는 ‘황금의 곱슬머리’를 잘랐다. 무성영화의 시대도 그해로 끝났다. 1929년 출연한 첫 유성영화 ‘코퀘트(바람둥이 여자라는 뜻)’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지만 인기는 예전 같지 않았다.
1933년 두 번째로 이혼했고 더는 영화를 찍지 않았다. 프로듀서로서 여전히 ‘할리우드의 대모(代母)’로 불렸지만 술에 취해 베벌리 힐스의 저택에 칩거하는 날이 길어졌다. 영화 ‘선셋 대로’(1950년)의 은퇴한 여배우 노마처럼.
1976년 아카데미 평생공로상을 받으며 녹화된 화면을 통해 대중 앞에 마지막으로 등장했고, 3년 뒤 타계했다. 에일린 휘트필드가 쓴 그녀 전기의 제목은 ‘할리우드를 만든 여성’이었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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