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50년 美스미스부대 한국 도착

  • 입력 2008년 7월 1일 02시 58분


부대원은 대부분 코리아를 몰랐다. 전투 경험이 있는 장병은 6분의 1 정도였다.

미국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는 일본 구마모토(熊本)에서 출동 명령을 받았다. 트루먼 대통령이 파병을 승인한 지 1시간 뒤, 1950년 6월 30일 오후 8시였다.

맥아더 장군은 북한의 남침 나흘 뒤 수원에서 지휘관 회의를 주재하다가 F-51기와 북한군의 야크-9기가 공중전을 벌이는 모습을 보고 지상군 투입을 건의했다.

1대대는 7월 1일 오전 8시 5분 이타즈케(板付) 공군기지에 도착했다. 찰스 스미스(중령) 대대장은 “가능한 한 북쪽에서 적의 침공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대대장의 이름을 딴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오후 3시 부산의 수영비행장으로 공수된다. 2개 중대 406명. 장병 1명이 M1 실탄 120발과 ‘C-레이션’ 이틀분을 갖고 있었다.

시민의 환영을 받은 뒤 2일 오전 8시 대전역에 도착했다. 경기 오산시 죽미령에 도착한 때는 5일 오전 3시였다.

소련제 T-34 탱크가 오전 8시 16분 나타났다. 미군이 포탄을 발사하면서 전투가 시작됐다. 북한군과의 첫 지상전이었다. 오전 11시 45분에는 보병이 사격을 개시했다.

북한군 제4사단의 제16, 18연대가 벌 떼처럼 달려들었다. 스미스 대대장은 권총을 빼어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불사조와 같이 보였다”고 통역관은 전했다.

탄약이 떨어지고 통신이 끊기자 스미스 대대장은 오후 2시 반에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북한군 42명이 숨지고 85명이 다쳤지만 미군도 181명이 죽거나 실종됐다.

적의 진격을 6시간 15분가량 늦춘 의미는 적지 않다.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이 이 전투의 여파로 주춤거리는 동안 한국군과 미군은 전열을 정비했다.

북한군 제2군단 작전참모는 “7월 초에 미 지상군이 오산에 와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놀랐다”고 말했다.

스미스라는 이름은 6·25전쟁에 자주 나온다.

미 해병 1사단은 1950년 11월 개마고원 장진호까지 진격했다가 중공군의 기습으로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포위망을 뚫고 10배 많은 중공군 12만 명을 궤멸시키면서 흥남까지 철수했다.

“후퇴가 아니라 새로운 방향으로 공격한다”는 명언을 남긴 사단장이 올리버 스미스 소장이다.

영화 ‘웰컴투 동막골’에서 산골마을에 비상착륙해 주민을 놀라게 했던 미 해군 조종사 이름도 스미스이다.

송상근 기자 song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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