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외과의사로 아내 살해라는 누명을 스스로 풀려는 도망자와 그를 검거해야만 하는 연방 경찰관이 벌이는 추격전을 다룬 영화 ‘도망자’의 한 장면이다.
도망자 역의 해리슨 포드와 추격자 역의 토미 리 존스 두 배우의 탄탄한 연기는 관객들의 손에 땀을 쥐게 했다.
1993년 앤드루 데이비스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1960년대 중반 이미 TV드라마로 제작돼 2년간 미국 ABC방송에서 방영됐고 국내에도 수입돼 큰 인기를 끌었다.
영화에서 리처드 킴블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도망자는 샘 셰퍼드라는 실존 인물이다.
정형외과 의사인 그는 1954년 7월 4일 미국 오하이오 주에 있는 집에서 임신 중인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다.
그는 이날 새벽 1층 거실 소파에서 잠을 자던 중 2층 침실에 있던 아내의 비명 소리를 듣고 올라갔으나 아내는 이미 숨져 있었다고 주장했다. 부인을 살해한 머리숱이 무성한 남자에게 맞아 기절했고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뒤 범인을 집 앞 호수까지 쫓아갔으나 다시 범인에게 맞아 정신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경찰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고 그해 가을 그는 재판에 넘겨졌다.
그동안 지역 언론들은 “왜 샘 셰퍼드가 교도소에 있지 않는가”라는 제목의 기사 등을 내보내며 그를 범인으로 몰아붙였다.
변호사는 그의 부인이 살해된 침실에 피가 흥건했지만 그의 옷에는 바지에 묻은 작은 핏자국 외에 어떠한 핏자국도 없었다는 것을 증거로 제시했다. 그러나 무죄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1954년 12월 21일 2급 살인죄를 선고받고 수감됐다.
18일 후 그의 어머니는 자살했다. 그로부터 11일 후 그의 아버지도 암으로 사망했다. 그는 부모의 장례식에 수갑을 찬 채 참석했다. 1963년 2월 13일에는 살해된 아내의 아버지가 오하이오 주의 한 모텔에서 자살했다.
1954년 1심 이후 항소와 상고가 잇따라 기각되자 그는 1964년 연방대법원에 인신보호영장을 신청했다. 연방대법원은 그를 석방하거나 재심하도록 오하이오 주에 지시했다. 드디어 1966년 재심에서 그는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영화 속의 ‘도망자’처럼 그는 교도소로 가던 도중 탈주하지 않았고 12년 동안 수감돼 있었던 것이다.
석방 후 그는 TV프로인 ‘자니 카슨의 투나이트 쇼’에 출연했다. 1975년 자니 카슨은 쇼에 나온 한 초대 손님에게 “셰퍼드가 나에게 ‘재심에서 또다시 유죄 판결을 받으면 자살하려고 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도망자 아닌 프로레슬러 생활을 잠시 하다 1970년 4월 세상을 떠나 오하이오 주의 한 공동묘지에 묻혔다. 1997년 그의 유해는 화장돼 아내의 유해와 한자리에 영원히 안치됐다.
이현두 기자 ruch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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