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7월 5일 프랑스 파리 몰리토르 수영장에서 열린 수영복 패션쇼.
디자이너 루이 레아르(1897∼1984)가 만든 여성 수영복이 등장하는 순간 1만여 명의 관중은 넋을 잃었다.
한 여성 모델이 가슴과 아랫도리만 겨우 가린 이른바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나온 것이었다. 아무리 수영복이라도 배꼽과 허벅지가 나온다는 것은 그 당시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유럽이나 미국에서 여성 수영복은 발목까지 가리는 치마 형태였다. 다리를 노출시키는 것은 금기시됐다. 영국에서는 숙녀 앞에 닭다리 요리를 내놓는 것도 큰 실례였다.
오늘날에는 수영장과 해변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여성의 몸을 90%나 노출시키는 비키니 수영복의 출현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비키니(bikini)라는 명칭은 태평양 마셜 제도의 서쪽에 위치한 비키니 섬에서 따온 것.
레아르는 자신이 디자인한 여성 수영복의 충격적인 이미지를 1946년 비키니 섬에서 실시된 원자폭탄 실험의 충격에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레아르는 패션쇼를 코앞에 두고도 모델을 구하지 못하는 난관에 봉착했다. 일반 패션모델은 아무도 비키니 수영복을 입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아르는 하는 수 없이 파리 한 카바레의 스트립 댄서를 동원했다.
비키니 수영복에 대해 바티칸은 부도덕하다고 비난했고 이탈리아와 스페인 포르투갈은 법으로 비키니 착용을 금지시켰다. 옛 소련은 ‘퇴폐적 자본주의의 또 다른 샘플’이라고 매도했다.
레아르는 비키니 수영복을 상표등록했지만 돈은 그다지 벌지 못했다고 한다. 극소수 육체파 여배우를 제외하면 비키니 수영복을 입으려는 일반 여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에서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나와 잠깐 화제를 모은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분위기는 1960년대 들어 바뀌기 시작했다. 히피 문화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퍼지면서 비키니 수영복은 점차 대중화되어 갔다. 1970년 신축 소재인 라이크라가 개발되면서 비키니 수영복은 더욱 작고 다양한 스타일이 가능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영식 기자 ysa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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