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54년 코닥 창립자 이스트먼 출생

  • 입력 2008년 7월 12일 03시 00분


‘연필처럼 쓰기 편한 카메라를 만들 수 없을까….’

1880년 미국 뉴욕 주 로체스터에 사진용 건판(乾板) 판매회사를 세운 조지 이스트먼은 보통 사람들에게 사진술을 확산시킬 방법을 찾느라 골몰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사진은 부유층과 사진사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는 1854년 7월 12일 뉴욕 주 북쪽의 워터빌에서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찌감치 타계하자 열네 살 때 학교를 중퇴하고 보험회사 사환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10년 뒤 저축은행 직원이 된 그는 휴가를 떠나려고 카메라를 처음 샀다. 지금의 전자레인지 크기였다. 어두운 텐트 안에서 유리판에 감광액을 바르고 마르기 전에 서둘러 촬영해야 했다. 장비를 옮기려면 말 한 마리가 필요했다.

휴가는 취소됐지만 이스트먼은 사진의 매력에 푹 빠졌다. 3년의 실험 끝에 감광액이 마르더라도 촬영할 수 있는 건판을 개발하는 데 성공해 곧바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사진을 보급하려는 계속된 노력은 돌돌 말린 ‘롤필름’의 발명으로 결실을 맺었다. 1888년에 이 필름을 넣은 코닥 1호 카메라가 나오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25달러짜리 카메라를 산 고객은 100장을 다 찍은 뒤 10달러를 동봉해 카메라째 이스트먼 코닥사(社)에 보냈다. 얼마 후면 사진과 새 필름이 든 카메라를 우편으로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셔터만 누르세요. 나머지는 우리가 맡겠습니다”라는 이 카메라의 광고 카피를 직접 썼다. 코닥(Kodak)이라는 브랜드도 직접 지었다. 영화의 발명도 그의 필름이 있어 가능했다. 그는 토머스 에디슨을 위해 영화용 필름을 만들었다. 뤼미에르 형제, 조르주 멜리에스 등 초기 영화 제작자들은 모두 코닥 필름을 썼다.

이스트먼은 박애주의자였다. 평생 1억 달러 정도를 매사추세츠공대(MIT), 로체스터대 등에 기부했다. 자기 주식의 3분의 1을 회사 직원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평생 독신으로 산 이스트먼은 척추 협착증으로 고통 받다가 1932년 목숨을 끊었다. “친구들에게, 내가 할 일은 끝났다. 왜 기다려야 하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일본의 후지, 독일의 아그파 등이 있었지만 코닥은 20세기 내내 세계 필름시장을 주도했다. 코닥을 위협할 진정한 경쟁자는 전혀 다른 분야에서 등장했다. 1981년 일본 소니는 필름 대신 ‘촬상소자’로 영상을 기록하는 카메라 ‘마비카’를 발표했다. 디지털카메라 시대의 개막이었다. 물론 그때만 해도 21세기에 ‘디카’를 넘어 ‘휴대전화 촬영’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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