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한 크리오요(식민지 태생 백인)로서 ‘인디오도 아니요, 유럽인도 아닌 중간 존재’라는 울분 속에 떨쳐 일어난 볼리바르. 스페인군 장교 집안에서 태어나 스페인에 충성을 맹세한 군인이었지만 결국 태생적 한계를 느끼고 크리오요 혁명가들과 하나가 된 산마르틴.
불굴의 의지와 용맹, 천재적 군사전략을 발휘한 두 사람의 성격은 사뭇 달랐다. 볼리바르는 신경질적이고 마음이 급한 이상주의자였지만 산마르틴은 매사에 신중하고 인내를 미덕으로 여기는 현실주의자였다.
볼리바르는 카라카스(베네수엘라) 보고타(콜롬비아) 키토(에콰도르) 등 남미 북쪽에서, 산마르틴은 라플라타(아르헨티나) 산티아고(칠레) 등 남쪽에서 각각 해방전쟁을 이끌었다.
두 사람이 맞부딪친 곳은 페루. 리마에 입성해 페루의 독립을 선언하고 섭정이 된 산마르틴은 볼리바르가 먼저 점령한 항구도시 과야킬(에콰도르)을 편입하길 원했다.
1822년 7월 26일, 두 사람은 과야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대면을 했다. 둘 사이에 무슨 얘기가 오고 갔을까. 두 사람만의 대좌였기에 여러 가지 추측만이 나올 뿐이다.
아마도 두 사람은 해방된 나라들의 장래 통치형태에 관해 의견이 엇갈렸을 것이다. 군주제에 마음이 끌렸던 산마르틴은 완강한 공화주의자 볼리바르를 설득할 수 없었는지 모른다.
두 지도자 간의 협력 문제도 있었다. 당시 44세로 다섯 살 연장자인 산마르틴은 볼리바르에 이어 자신은 2인자의 지위로 족하다고 제안했지만 볼리바르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멕시코 작가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원제 ‘묻혀진 거울’)에서 과감히 이렇게 썼다. ‘산마르틴은 볼리바르에게 “나는 내 과업을 완수했네. 뒤에 오는 영광은 다 자네 것일세.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겠네”라고 말했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산마르틴이 회담 결과에 낙담해 서둘러 리마로 돌아갔다는 점이다. 산마르틴은 이후 프랑스로 망명해 자신이 해방시킨 땅에 다시 돌아가지 못한 채 7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볼리바르는 해방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지만 피비린내 나는 무질서 속에서 암살 위협에까지 직면한 그는 실의에 빠져 1830년 “아메리카는 이제 통치불능”이라고 한탄하며 세상을 떴다. 통합되고 강력한 국가를 꿈꿨던 두 사람의 꿈과 달리 남아메리카는 이후 분열의 길을 걸었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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