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무반에서 단잠을 즐기던 10명을 때려눕히고 침대와 유리창을 부순 뒤 주번사령실을 장악했다.
습격당한 부대는 30분 뒤 비상을 걸었다. 연병장에 모인 700여 명이 동료에게 중상을 입힌 해병 장교들에게 달려들었다.
좌익이 일으킨 여순반란사건(1948년)을 제외하면 창군 이래 처음인, 아군 부대끼리의 충돌이었다. 1966년 8월의 얘기다.
진해해병학교 기초반 장교 8명이 7일 오후 7시 20분 부산발 시외버스에서 김해공군비행학교 장교 3명을 만났을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
해병 장교들이 공군 장교들의 모자를 뺏으면서 시비가 붙었는데 8 대 3이라 공군 장교들이 일방적으로 맞았다.
이 사실을 연락받은 비행학교 장교 30여 명은 트럭으로 시외버스를 쫓아갔다. 경남 창원군 웅동면에서 ‘경남 영 228호’ 차량을 강제로 세운 뒤 해병 장교를 끌어내려 곤봉과 권총으로 후려쳤다.
부진(釜鎭)가도의 난투극으로 동료가 피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오자 해병학교 동료들이 흥분했다. 해병 장교 127명이 이튿날 오전 4시 통근열차 편으로 진영읍에 모였다.
이들은 민간 트럭과 버스로 비행학교 입구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포복으로 논밭을 통과해 정문을 기습했다.
해병 장교들은 보초를 서던 공군 헌병의 권총을 빼앗고 조종학생 내무반으로 안내하라고 위협했다.
양측의 난투극은 10분간 계속됐다. 해병 장교들은 수적 열세로 몰리자 “계속 추격하면 비행기를 부숴버린다”면서 돌을 던져 T-28 2대의 날개와 프로펠러를 부쉈다.
해병 장교 1명이 철조망 밖의 평강천에 빠졌다가 구조됐지만 오전 9시경 숨졌다. 또 공군 25명과 해병 14명이 중상을 입었다.
국방부는 패싸움 가담자는 장교 자격이 없다고 모두 파면하려다가 주동급인 공군 5명, 해병 10명을 구속하고 두 학교 교장을 해임했다.
나머지는 훈방했다. 관련된 장교들이 베트남에 보낼 보충요원이고 임관된 지 얼마 안 됐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국방부는 “베트남 전선과 휴전상태를 감안해 앞으로 전군에서 발생하는 범죄는 전시규정을 적용해 가중 처벌키로 했다”고 밝혔다.
두 부대의 모든 장교와 사병은 10일 오후 3시 진해해병학교 교정에 모여 자매결연을 하고 우의를 다짐했다.
당시 기사를 읽다가 부상자 중에서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기자가 전화를 걸었더니 “내가 맞다”고 이억수 전 공군참모총장이 얘기했다.
송상근 기자 song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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