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가 유명해진 것은 1911년 8월 21일 대낮에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도난 당한 이후부터였다. 도난 당할 당시 모나리자는 그리 중요한 작품이 아니었기 때문에 루브르 박물관의 한 복도에 걸려 있었고 도난 방지 시스템도 없었다.
프랑스 경찰은 모나리자를 찾는 데 그리 열의를 보이지도 않았다. 모나리자가 세인의 눈앞에 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은 2년 후 범인이 자수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이다. 레오나르도는 피렌체 출신이고 모나리자도 피렌체 사람이기 때문에 모나리자를 이탈리아가 되찾아 온 것뿐이다.”
범인이 자수할 때 한 이 말이 진짜 범행 동기인지, 아니면 유럽 깊숙이 깔려 있는 민족주의와 애향심에 호소한 그럴듯한 핑계인지는 확실치 않다.
어쨌든 모나리자와 범인이 만약 피렌체 출신이 아니었고 민족주의와 연관이 없었다면 모나리자는 그렇게 유명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제작 연도가 1503∼1506년인 모나리자의 ‘모나’는 이탈리아어로 유부녀에 대한 경칭, 리자는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 델 조콘다의 부인 이름이다.
모나리자는 피렌체에서 제작됐고 다빈치 자신이 생전에 소장하고 있었다.
그러다 다빈치가 프랑스에서 살다가 숨졌고 모나리자는 다빈치에게 각종 도움을 준 프랑스 왕실의 소유가 됐다. 도난 사건이 해결된 후 프랑스는 유럽의 민족주의를 존중해 이탈리아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이탈리아는 모나리자를 프랑스에 영구적으로 빌려주는 형식으로 되돌려주었다.
모나리자는 단 두 번의 ‘해외 나들이’를 했다.
첫 번째는 도난사건에 의한 이탈리아행이었고 두 번째는 미국 방문이다.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 당시 모나리자는 프랑스의 외교사절단 형식으로 미국에 갔다. 당시 모나리자는 ‘국빈’ 대접을 받았고 비행기의 화물칸이 아닌 일등석을 타고 갔다
한편 영국에서는 모나리자의 모사품이 발견됐는데 전문가 감정 결과 그 작품 또한 다빈치의 진품인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다빈치는 모나리자를 두 개 그렸다고 한다.
‘신비로운 미소’로 유명한 모나리자는 그림 자체가 신비로움을 가지는 것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에피소드 때문에 지금은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명화’로 대접받고 있다.
안영식 기자 ysa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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