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이 선언을 거부했다. 곧바로 일본의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소련마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자 일본은 더 버틸 수가 없었다.
8월 10일 일본은 항복을 결정하고 이를 연합국에 통보했다. 일부 장교가 항복을 거부하며 쿠데타를 계획했지만 역사의 물결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1945년 8월 15일 낮 12시. 일왕 히로히토(裕仁)의 항복 선언이 전파를 타고 한국과 일본 전역에 퍼져나갔다. 한국의 광복이었다.
하지만 일본이 그날 항복 문서에 공식적으로 서명한 것은 아니었다. 항복의 공식 서명은 1945년 9월 2일 일본의 도쿄(東京) 만 요코하마(橫濱)에 정박 중이던 미국 전함 미주리 선상에서 이뤄졌다. 당시 항복 문서에 서명한 일본인은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외상이었다. 그는 중국 상하이(上海) 훙커우(虹口)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왼쪽 다리를 잃었던 사람이었다. 실질적인 광복은 8월 15일이었지만 공식적인 문서상의 광복은 9월 2일이 되는 셈.
그런데 이 자리에서 놀라운 소식이 터져 나왔다.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경계로 남과 북을 점령한다”는 내용의 분할점령 정책을 발표한 것이다. 일본의 항복과 한국의 독립이 곧 한국의 분단이 되어 버린 역사의 비극이었다.
이에 따라 9월 8일 한국에 미군이 들어왔다. 다음 날인 9월 9일, 서울의 조선총독부 중앙회의실에서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총독이 미군 제24군단의 존 하지 중장과 장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 한 번 항복문서에 서명을 했다. 곧바로 총독부 건물(1996년 철거)에서 일장기가 내려갔다.
63년 전, 광복의 환희에서 분단의 비극으로 뒤바뀌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보름 남짓. 그렇게 긴박했던 1945년의 8월과 9월은 영욕(榮辱)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