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此)로써 세계 만방에 고(告)하야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克明)하며, 차로써 자손만대에 고(誥)하야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기미독립선언서’에서·1919년 작)
한국인이면 배우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한국 근대기의 명작품, 명문장이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1890∼1957).
1910년대 계몽주의 문학의 대표 주자로 한국 근대문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고 한문투 문어체를 구어체로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시조문학을 현대적으로 계승 발전시킨 인물, 그리고 한국의 역사, 민족문화와 사상의 근원을 탐구해 온 인물이다.
그러나 이 같은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육당은 우리 근대사에 있어 하나의 상처로 남아 있다. 1930년대부터 일제에 동조하고 학병 참여를 적극적으로 독려하는 등 친일이라는 오점을 남겼기 때문이다.
육당은 1940년대부터 서울 강북구 우이동에 살면서 친일의 글도 쓰고 우리의 역사와 사상을 탐구하는 글도 썼다. 광복 이후엔 반민족행위자로 기소돼 수감 생활을 하기도 했다. 출감 이후 ‘조선역사사전’을 집필하다 1957년 10월 10일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육당이 말년에 살았던 우이동 한옥의 이름은 ‘소원(素園)’이었다. 2002년 말, 이 고택을 놓고 한바탕 논란이 있었다. 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였다.
수개월의 논란 끝에 2003년 1월 서울시 문화재위원회는 “최남선이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했던 곳이고 건물도 낡아 보존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 두 달 뒤 육당의 고택은 철거됐다.
당시 육당의 후손들은 “건물이 남아 있으면 자꾸만 친일이라는 아버지의 상처가 덧나는 것 같다”며 이 건물을 한 건설회사에 팔았고 그 회사는 건물을 헐고 아파트를 지었다.
문학평론가 고 김현은 “최남선이나 이광수의 친일은 만지면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라고 말한 바 있다. 육당이 세상을 떠난 지 51년. 그의 상처는 우리 모두의 상처이기도 하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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