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86년 야당 의원 발언 용공 논란

  • 입력 2008년 10월 13일 02시 57분


“崔부의장은 발표를 통해 △13일 본회의 정회사태에 대해 의장이 유감표명을 하고 이와 함께 국회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의원들의 협력을 요청한다 △앞으로 의원은 容共的발언을 하지 않도록 노력키로 총무들이 합의했다고 밝혔다.”

동아일보 1986년 10월 14일자 1면 톱기사 내용이다. 여야 3당 총무가 이날 국회의사당 내 귀빈식당에서 국회 의장단과 회의를 한 결과였다. ‘용공적 발언’이란 무엇이었을까.

신민당 김현규 의원은 하루 전의 대정부 질문에서 전두환 정권을 가리켜 ‘국헌을 수호할 수 없는 정권, 국가를 보위할 수 없는 정권, 더 이상 존속할 가치와 자격이 없는 정권’이라고 비판한 뒤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 정권이 야당의 제의를 거부하고 합의개헌에 실패한다면 야당은 이 나라 전 민주세력과 연대하여 군사정권의 종식과 현 정권의 집권 연장 음모를 봉쇄하기 위한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

전두환 정권과 민정당은 그해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받아들여 국회에 개헌특위를 만들었다. 하지만 부천서 성고문 사건으로 여론이 악화됐고 재야세력은 반정부 투쟁을 본격화했다.

이런 시점에 김 의원이 정권의 정통성을 건드리자 민정당 의원들은 야유를 보내면서 본회의장에서 퇴장해 버렸다.

정부와 여당은 신민당 유성환 의원의 14일 질문도 문제 삼았다. “국시는 반공보다 통일이어야 한다. 통일이나 민족이라는 용어는 그 소중함을 생각하면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라는 용어보다 그 위에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검찰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이튿날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법무부는 체포동의요구서를 국회에 접수시켰다. 원고를 국회발언 하루 전에 국회기자실에 배포해 사전에 유출했으므로 면책특권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유 의원은 17일 구속됐다. 같은 달 28일에는 26개 대학생 2000여 명이 건국대에서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헬기까지 동원하며 1219명을 연행한 뒤 대부분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이듬해 1월에는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경찰조사를 받다가 고문을 당해 숨졌다. 6월 민주항쟁의 불씨가 서서히 번지기 시작했다.

송상근 기자 song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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