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전인 1997년 11월 직장인들은 감원 공포에 벌벌 떨었다. 간판기업인 삼성그룹을 시작으로 기업에선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삼성의 인력감축 발표는 뼈를 깎는 구조조정의 신호탄이었다.
이해 11월 27일 동아일보 1면 사이드 머리기사는 삼성그룹 사장단회의 소식이었다.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 주재로 열린 사장단회의에선 ‘경영체질 혁신방안’을 논의했다. 실상은 직원을 자르고 임금을 감축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지금은 대세이지만 당시로선 생소했던 연봉제가 도입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삼성은 이 회의에서 임원은 물론 부장과 차장급 간부사원을 대상으로 1998년부터 연봉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또 창사 이래 처음으로 임원 연봉 10% 삭감을 결정했다. 과장급 이하 일반사원들의 임금은 묶기로 했다.
삼성의 초긴축 선언은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파고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삼성은 그때까지 자동차사업에 2조6000억 원을 쏟아 부었고 2002년까지 1조7000억 원, 2010년까지 5조7000억 원 등 모두 10조 원을 투자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삼성의 주력사업인 반도체 값이 폭락해 자금조달이 여의치 않은 데다 그룹 자금줄인 삼성생명도 금융위기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삼성의 초긴축 경영방침은 다른 대기업들의 구조조정으로 이어졌다.
현대자동차는 2000년까지 5000여 명을 자르겠다고 선언했고 한라중공업은 임직원의 절반인 3000여 명을 감축하기로 결정했다. LG그룹 회장실의 한 임원은 “삼성의 조직 30% 축소는 충격적”이라면서 “다른 그룹의 구조조정은 이보다 훨씬 더 강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예측은 딱 들어맞았다.
IMF협의단은 한국의 구제금융 협상을 위해 같은 해 11월 24일부터 방한 중이었다.
휴버트 나이스를 단장으로 하는 협의단은 금융환율팀과 거시경제팀 외환수급팀 산업정책팀으로 나눠 금융과 산업의 구조조정을 강하게 압박했다. IMF협의단은 은행과 종금사 등 부실 금융기관 파산과 정리를 요구했고 과당 경쟁을 보인 자동차산업의 합병과 정리해고제 도입을 촉구했다. IMF 자금을 지원하는 데 대한 혹독한 구조조정 주문이었다.
그때 신문을 보면 마치 최근 금융위기 관련 보도를 보는 것 같다.
그해 뉴욕의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A+에서 A-로 두 단계나 낮췄다. 11월 27일 종합주가지수는 433.10으로 1987년 7월 6일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3년 만기 회사채수익률은 연 17.25%로 5년 10개월 만에 최고치를 찍는 고공행진을 했다. 주가가 폭락하자 정부는 투자신탁회사가 갖고 있던 국공채 2조 원을 한국은행이 사들이도록 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식물 대통령’으로 불렸다. 정치권에선 12월 대선을 눈앞에 두고 이회창(한나라당) 김대중(국민회의) 이인제(국민신당) 후보가 문민정부의 경제 실정을 맹렬히 공격했다. 외환위기에 짓눌린 11년 전 우리 국민은 엄동설한보다 더한 추위에 떨어야 했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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