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61년 링컨, 슈어드 국무장관 지명

  • 입력 2009년 1월 10일 03시 04분


윌리엄 헨리 슈어드(1801∼1872). 10년 넘게 미국 상원의원을 지냈고 뉴욕 주지사를 두 차례나 지낸 정치인이었다. 그의 뛰어난 정치 수완을 두고 한 친구는 “소가 말을 알아들을 수만 있다면 슈어드는 소마저도 선동할 만한 사람”이라고 했다.

1860년 슈어드가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을 때 모든 사람이 그의 승리를 확신했다. 전당대회 당일 그의 고향 오번에서는 축포를 쏘기 위해 병기고에 있던 커다란 대포를 공원으로 옮겼다.

슈어드 역시 전당대회 전 이미 상원 고별사를 작성해뒀다. 후보가 되면 바로 의원직에서 물러나야 했기 때문이다. 전당대회 1차 투표에서 슈어드가 1위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그런 낙관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2위를 차지한 일리노이 출신의 에이브러햄 링컨이 3차 투표에서 승리를 가로챘다는 소식에 슈어드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링컨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변호사 자격증을 딴 인물. 전국 수준의 정치 경험이라곤 한 차례 하원의원에 당선된 것이 전부였다. 상원의원 선거에선 두 번이나 낙선했다. 그런 링컨에게 당한 패배를 슈어드로선 쉽게 인정하기 어려웠다.

슈어드는 비록 링컨을 지지한다는 공개서한을 내긴 했지만 링컨의 대선 승리 가능성을 의심했다. 선거운동에 합류해달라는 요청이 거듭됐지만 계속 미루다 3개월 뒤에야 유세에 참여했다.

대선에서 승리한 링컨이 슈어드에게 내각 참여를 제안했을 때 그는 새 행정부에서 링컨은 얼굴마담일 뿐 자신이 더 큰 권한을 휘두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각료의 임명에도 관여할 생각이었다.

1861년 1월 10일, 국무장관 지명이 발표된 뒤 슈어드는 ‘미국의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가 됐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링컨은 슈어드를 포함한 당내 경선 주자 3명을, 나아가 옛 민주당 출신까지 내각에 포진시켰다. 이질적인 각료들 사이에서 링컨은 확실하게 결정권을 거머쥐었고 그들로부터 최고의 역량을 끌어냈다.(도리스 컨스 굿윈의 ‘권력의 조건’)

슈어드 역시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국무장관으로서 링컨의 조력자 역할에 충실했다. 남북전쟁의 위기에서 그는 탁월한 외교 수완으로 유럽 국가가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막아냈다.

며칠 뒤 취임하는 버락 오바마 차기 대통령은 최고의 라이벌이던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을 국무장관으로 지명했다. 링컨의 파격적 용인술에서 배운 통합의 리더십이다. 오바마-힐러리 라이벌 콤비가 엮어갈 미국 외교가 어디로 갈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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