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잠실체육관에 9000여 명이 모여들었다. 제5공화국을 세운 전두환 당시 대통령을 당 총재로 추대하고 제12대 대통령후보로 받드는 자리였다.
새 당의 이름은 민주정의당(약칭 민정당). 제5공화국 헌법 아래 태어난 첫 정당이다. 이 날은 민정당 창당대회와 동시에 대통령후보를 지명하는 날이기도 했다. 전국에서 모인 대의원 3162명과 일반 당원 및 각계 대표, 주한 외교사절 등 내빈 6000여 명이 창당대회를 지켜봤다.
하지만 말이 창당대회지 미리 짜인 각본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결의대회나 다름없었다. 대통령후보 결정도 후보들이 각축전을 벌이며 경선을 통해 뽑는 게 아니라 만장일치로 추대하는 전형적인 ‘체육관 전당대회’였다.
오전 10시 정각 개회선언과 함께 태극기와 민정당기(旗)가 입장했다.
이재형 대회 의장은 개회사에서 “우리는 혼란의 심연과 분열의 준령을 넘어 새 역사의 지평에 서서 새 시대의 막을 여는 중대하고 엄숙한 시점에 와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정례 대의원이 “10·26사태 후 절망적인 상황에서 구국(救國)하신 전두환 대통령을 당의 총재로 모시자”고 제의해 큰 박수를 받았다.
당헌 채택에 이어 전 대통령의 당 총재 추대를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그때까지 휘장에 가려 있던 전 대통령 초상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의원과 당원들이 치켜든 피켓에는 전 대통령 초상화와 함께 ‘민주’ ‘정의’ ‘전두환 총재 각하 만세’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 이어 전두환 총재를 제12대 대통령후보로 지명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이재형 의장은 “나는 이제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을 모셔오겠다”고 말한 뒤 대회장을 빠져나갔다. 전 대통령은 오전 11시 43분 KBS 교향악단의 대통령 찬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대회 참석자들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이순자 여사와 함께 대회장에 입장했다. 전 대통령은 이 의장에게서 당기를 건네받은 뒤 힘차게 흔들어 보였다.
전 대통령은 당 총재 및 대통령후보 수락연설에서 “당원동지 여러분의 추대를 수락한 것은 그것이 영광의 자리나 권세를 약속하는 자리이기 때문이 아니다”라며 “시작한 일은 마무리돼야 하며 이를 위한 책임과 의무를 기피해서는 안 되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나를 포함한 많은 국민이 그동안 지탄해왔던 그런 유(類)의 정치인으로 나 자신을 타락시키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라고 다짐하기도 했다.
이날 전 대통령 연설의 핵심은 장기집권 추방과 정치근대화 지향이었다.
그러나 “지탄받는 정치인이 되지 않겠다”는 전 대통령의 다짐과 달리 이날은 군사독재 정권의 연장을 알리는 서막이기도 했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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