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본토에서 1000km 남쪽에 있는 면적 20km²의 작은 화산섬인 이오(硫黃) 섬. 태평양전쟁의 가장 피비린내 나는 격전지로 기록된 이오 섬은 미군으로선 어떻게든 확보해야 할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동안 마리아나 제도를 이륙한 미군 B-29 폭격기는 이곳을 피해 개다리처럼 구부러진 항로를 날아 일본 본토를 폭격해야 했다. 연료는 많이 들고 폭탄 적재량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오섬은 귀환하는 폭격기의 비상착륙지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막바지로 치닫는 태평양전쟁의 승기를 굳히고 일본인의 사기를 일거에 꺾을 이오 섬 점령, 즉 ‘분리 작전(Operation Detachment)’은 몇 시간 동안 계속된 엄호 폭격으로 시작됐다.
미 해병 3만 명이 이오 섬 해변에 처음 상륙한 것은 오전 9시경. 이들을 맞이한 것은 죽음 같은 정적이었다. 폭격으로 일본군이 전멸한 것일까? 척후병들은 서서히 해발 166m의 스리바치(摺鉢) 산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전진했을까. 갑자기 은폐돼 있던 일본군 벙커와 진지로부터 총알이 쏟아졌다. 이오 섬은 지하 벙커와 땅굴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고 잘 위장된 대포가 곳곳에 배치된 어마어마한 요새였던 것이다.
일본군의 포격과 기관총 세례에 미군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평평한 화산섬 지형은 몸을 숨길 구멍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수많은 희생 끝에 미군은 대포와 전차, 화염방사기를 총동원해 무수히 많은 일본군 방어 거점을 하나하나 찾아 공격해야 했다.
상륙 닷새째인 23일 미군은 스리바치산 정상에 가까스로 성조기를 꽂을 수 있었다. 성조기를 게양하는 해병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이 됐다. 이 사진에 얽힌 사연은 ‘아버지의 깃발’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미군이 이오 섬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3월 말. 그동안 미군은 병력 11만 명을 투입해야 했고, 이 중 6821명이 죽고 2만 명 가까이 다쳤다. 옥쇄 작전을 편 일본군은 2만여 명이 죽고 1000여 명만이 포로로 잡혔다.
상륙전을 지휘한 홀랜드 스미스 해병 중장은 “해병대 역사에서 이만큼 처절한 전투는 없었다”고 회고했다.(폴 콜리어 외, ‘제2차 세계대전: 탐욕의 끝, 사상 최악의 전쟁’)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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