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은 음악이 아니라 횡설수설하는 음표 더미들이다.”
1936년 1월 어느 날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를 펼쳐든 30세의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자기 작품을 혹평한 기사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2년 전 소련에서 초연된 뒤 미국, 유럽에서 극찬을 받고 있던 작품이었다.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이 전날 이 오페라를 관람한 사실을 안 쇼스타코비치는 더 큰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여주인공이 애인을 위해 남편과 시아버지를 살해하는 내용의 오페라를 보던 스탈린은 “부도덕하고 퇴폐적”이라며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절대 권력자의 노여움이 다음 날 신문에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곧바로 소련 음악계는 그의 음악이 ‘부르주아 미학’에 기초했다며 일제히 비판하고 나섰다. 촉망받던 음악가는 음악 분야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논쟁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됐다.
숙청의 불안감에 떨던 그는 이듬해 발표한 5번 교향곡 ‘혁명’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가장 부합되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은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쇼스타코비치는 190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러시아혁명 2년 뒤인 1919년 페트로그라드 음악원에 입학했으며 졸업 작품인 1번 교향곡으로 천재 작곡가의 탄생을 세상에 알렸다. 거침없이 성가를 높여가던 그는 오페라 사건으로 처음 좌절을 겪었다.
2차 세계대전도 그의 음악에 영향을 미쳤다. 쇼스타코비치는 고향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당시 명칭)가 독일군에 포위된 1941년에 7번 교향곡 ‘레닌그라드’를 작곡했다. 1942년 3월 5일 시베리아에서 이 곡이 초연되자 소련 당국은 반(反)나치 투쟁의 찬가로 치켜세웠고, 미국 등 연합국 음악계도 열광했다.
끝난 줄 알았던 스탈린과의 불화는 전후에 재연됐다.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장중한 곡을 원한 스탈린의 뜻과 달리 쇼스타코비치가 발랄한 분위기의 9번 교향곡을 발표한 것. 스탈린은 격분했고 그의 예술고문 안드레이 즈다노프는 1948년 악명 높은 ‘즈다노프 비판’으로 쇼스타코비치를 공격했다. 이듬해 국토개조계획을 찬양한 오라토리오로 스탈린상을 받고 난 뒤에야 복권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쇼스타코비치는 20세기 최고 작곡가라는 찬사와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을 함께 받았다. 하지만 사망 후 4년이 지난 1979년 공개된 회고록에서 그는 “교향곡 7번은 단지 점령된 레닌그라드가 아니라 스탈린이 철저히 파괴하고, 히틀러가 마지막 타격을 가한 레닌그라드를 애도한 곡”이라고 밝혔다. 공산당과 스탈린이 격찬한 곡에 폭정에 대한 저항정신을 담아 조롱함으로써 ‘음악적 복수’를 한 것이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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