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엄규숙/국민연금 '신뢰체계' 만들자

  • 입력 2003년 8월 21일 18시 24분


가입자가 내는 돈은 늘리고, 나중에 받는 돈은 줄이겠다는 정부의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둘러싼 논란이 한창이다. 이대로 가면 연금재정이 고갈될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조치라는 설명이지만 이를 선뜻 받아들이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 ‘더내고 덜받는’ 개정案 설명 부족 ▼

88년 국민연금 제도가 도입된 뒤 관련 제도가 몇 차례 바뀌었고, 그때마다 비슷한 논란이 있었다. 국민연금법에 따르면 앞으로도 5년마다 재정을 다시 계산해야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같은 논란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우리 국민연금의 ‘진실’을 솔직히 털어놓고 이 제도에 대한 사회적 합의 내지 신뢰체계를 세우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우선 이번 개정안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논란 가운데 재정고갈과 급여삭감에 관한 몇 가지 오해와 진실을 짚어보자.

정부의 재정추계에 따르면 2047년에는 국민연금의 기금이 바닥난다고 한다. 세계에 유례없는 초고속 고령화로 인해 그동안의 적립금으로 급여를 줄 수 있는 기간이 40여년에 불과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기금이 고갈된다고 해서 연금제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뒤에는 거둬들이는 보험료로 연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전환하게 된다. 일정 시점이 되면 연금재정의 운용방식이 바뀌는 것뿐이다. 이 점에서 국민연금 기금이 고갈되면 더 이상 급여를 지급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주장은 한마디로 ‘오해’다.

가입자의 기여 대비 급여수준 문제를 둘러싼 오해도 많다. 국민연금 보험료는 88년 월 소득의 3%였으나 이후 줄곧 올라 현재 9%선에 이르렀다. 가입자들로서는 돈을 더 내는데 왜 급여를 줄이려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현행대로 보험료 9%를 40년간 납입한 뒤 월 수입의 60% 급여수준을 유지할 경우, 가입자들이 낸 돈보다 받아가는 연금 급여가 훨씬 많다는 것이 ‘진실’이다. 국민연금은 어떤 민간 생명보험보다도 우수한 상품인 것이다.

문제는 과연 몇 사람이나 40년 가입기간을 채우고 은퇴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외환위기 이후 대규모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40대 조기 퇴직이 흔한 일이 됐다. 정부추계로도 연금 가입자의 보험료 평균 납부기간은 20.7년이다. 20년 가입자는 소득의 30% 정도를 연금으로 받게 된다. 때문에 급여수준을 현행보다 더 낮추면 국민연금의 노후소득 보장기능이 사실상 무의미해진다는 것이 또 다른 ‘진실’이기도 하다.

이 같은 오해와 진실을 넘어, 연금제도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고자 한다.

공적 연금제도는 개인의 노인부양 책임을 사회가 나누어 지는 제도다. 현재 연금 가입자들은 연금을 받지 못하는 부모세대를 봉양하면서 자신의 노후준비도 해야 하는, 어찌 보면 ‘낀 세대’다. 이들에 대해 ‘급여삭감’이나 ‘다음 세대와의 갈등’을 말하기 전에, 그 부담을 ‘사회적’으로 나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온 국민이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 노인부양 책임을 어떻게 ‘사회화’할 것인지, 연금가입자간, 세대간 공정한 사회적 계약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창출하는 틀이 마련돼야 한다.

▼사회적 합의 기금운용委 독립 시급 ▼

이러한 사회적 합의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독립된 상설 국가기구로 기금운용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이 시급하다. 기금적립과 운용을 둘러싼 국민의 불신은 연금제도 초기부터 정부가 기금을 쌈짓돈처럼 가져다 쓴 관행에서 비롯됐다. 98년 연금법 개정 이후 이 같은 불신의 소지가 상당부분 제거되기는 했다. 그러나 연금 기금 수익률이 1% 증가할 때마다 3.7%의 보험료 인하 효과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총 100조원에 이르는 막대한 기금이 제대로 운용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가입자의 신뢰 확보 장치는 반드시 필요하다.

가입자들이 정책결정과 기금현황을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정착되면 정부가 주식투자를 잘못해서 연금기금을 다 까먹었다는 오해를 받지 않아도 될 것이다. 또 기금상황에 근거해 보험료나 급여수준을 조정해야 할 때도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지금보다 훨씬 쉬울 것이다.

엄규숙 경희사이버대 교수·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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