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든 그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내가 그 사건과 관계가 없다는 걸 확인해야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이 사건도 그렇다. 범인의 독특한 지난날, 특이한 전력이 부각되는 이유는 ‘이건 나와 멀리 떨어져 있는 일이야’라고 여기고 싶은 무의식적 욕구 때문이다. 그러나 찬찬히 이 사건의 속내를 살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살아있음을 확인하려는 범행▼
범인은 외로운 사람이었다. 14세에 아버지가 사망한 후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소년원에 들어갔고, 21세부터는 사회에서 지낸 기간보다 교도소에서 더 오래 있었다. 20대 초반 결혼했지만 2년 전 이혼을 당한 후 더욱 고립감에 시달렸다. 그런 외로움은 내적으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인을 요구했을 것이다. ‘나는 살아 있는가’라고 말이다. ‘온 가족이/모였던 순간이었습니다/모처럼 많은 대화 나누며/웃을 수 있었던 자리였습니다’는 그의 자작시에서도 ‘관계’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대부분의 연쇄살인범은 개인적 이익이나 어떤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살인을 하지 않는다. 살인은 그가 갖는 ‘힘과 소유’의 환상을 충족시키려는 행동이며 심리적으로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한 의식일 따름이다. 외로움을 극단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기 위해 충동적으로 시작한 일에 어느새 중독돼 버렸다. 타인의 휴대전화를 이용하고 DNA 검사에 걸릴까봐 불을 지르는 등 범행을 치밀하게 저지르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지난해 9월부터 석 달간 노인들을 살해하다 잠시 살인을 멈춘 시기에 한 여성을 만났고, 그와 헤어진 후 다시 살인을 시작해 7월 들어 발작적으로 그 빈도가 늘어났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그만큼 그가 느끼는 외로움은 강했고, 관계의 거절에서 받은 상처는 컸다. 다만 그 상처에 대한 반응이 너무나 극렬하고 용납될 수 없는 방식이었다는 게 비극의 발단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그런 마음은 누구나 한 자락씩 느끼고 있는 외로움과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현대사회의 정서적 특징에 다름 아니다.
강남에 살지만 대낮에 혼자 집을 지키는 노인들, 외로운 이의 욕정을 달래는 전화방 여인들, 전기톱소리 물소리가 난다 해도 괜히 남의 삶에 개입했다 낭패 보는 게 싫은 원룸 생활, 개인적 삶의 총아인 휴대전화, 그의 방 한구석에 놓여 있는 PC와 인터넷. 이 사건과 연루된, 이 시대의 아이콘들은 생경한 것이 아니다. 자발적 무관심, 개인화, 고립감, 외로움을 상징하며 주변에 항상 있는 것들이다. 이런 고립감의 상징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가 한쪽 구석 좀 더 소외된 곳에서 무차별적 증오와 폭력이라는 용납될 수 없는 괴물이 태어나게 한 것이 이 사건의 본질이다.
▼이웃의 고통에 마음 열어야▼
이번 사건을 엽기적인 살인마의 비정상적인 치밀한 범행으로 결론지으며 덮는다면 마음도 편하고 곧 사회에서도 잊혀질 것이다. 그러나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마음속의 열어 보고 싶지 않던 외로움과 단절의 고통을 열어봐야 한다. 그러면 어느새 내 주변의 타인의 고통이 보이고 느껴지기 시작하며, 그가 외로움의 끝에 서지 않도록 도울 길이 열릴 것이다.
거창한 사회적 범죄예방 시스템 구축보다 보고 싶지 않아 덮어 두었던 내 마음 속을 들여다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지금 현대인에게 필요하며, 그것이 추악한 사회의 병리현상을 치유할 밑거름이 되리라 믿는다.
하지현 용인정신병원 진료과장·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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