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꽃’ 지상에 남기고…타계한 김춘수시인 삶과 예술

  • 입력 2004년 11월 29일 19시 19분


언어의 예술가라는 평을 듣었던 김춘수 시인. 그는 8월 기도폐색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도 시 쓰기를 계속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언어의 예술가라는 평을 듣었던 김춘수 시인. 그는 8월 기도폐색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도 시 쓰기를 계속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전쟁 직후 부산의 한 서점에서 선생의 ‘꽃’이라는 시집을 처음 보고 아, 시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감동을 받았지요. 그때부터 선생님은 저의 정신적 스승이나 마찬가지예요.” (홍윤숙·79·시인·예술원 회원)

“선생은 언어 예술가이셨습니다. 평소 자식이나 제자들에게는 아주 따뜻하셨지만 시에 대해서만큼은 그렇게 차갑고 치열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평생 시만 생각하며 살다 간 분이지요.” (조영서·72·시인)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애송시로 꼽힌 ‘꽃’의 지은이 김춘수 시인의 빈소가 마련된 삼성서울병원 영안실은 29일 오전부터 부고를 듣고 찾아온 문인들과 일반인들로 붐볐다. 고인은 8월 4일 기도폐색으로 쓰러져 경기 성남시 분당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넉 달 동안 긴 잠을 자다 끝내 영원히 눈을 감았다.

노시인은 여든 넘은 나이에도 시와 산문을 쏟아내며 글쓰기를 평생 업으로 삼은 근대문인의 초상이었다.

시만을 놓고 보면 그는 반(反) 현실주의자 또는 반 역사주의자였다. 사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법이 없었고 인생의 지혜에 대해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에게 시는 삶을 위해 있지 않고 시 그 자체로 존재했다. 시에 관한 한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만이 진실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예술지상주의자였다.

고인은 스무 살이었던 1942년, 일본 니혼(日本)대 유학생활 중 가와사키 부두에서 하역작업을 하다가 한국인 동료들과 함께 일본 천황과 총독정치를 비방한 것이 동료의 고자질로 알려져 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퇴학당했다. 그는 고향에 돌아온 뒤에도 광복이 될때까지 불령선인(不逞鮮人)의 딱지가 붙여진 채 살았다.

고인은 생전에 “함께 수감돼 있던 일본의 유명한 좌파 교수가 모진 고문이 끝난 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을 혼자 먹는 것을 보고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5년 전 부인과 사별한 뒤 직장에 다니는 외손녀 두 명과 함께 성남시 분당에 살았던 고인은 기도폐색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시작(詩作)을 멈추지 않았다. 전집 발간 이후 써 온 시를 엮은 신작 시집 ‘달맞이꽃’이 12월에 출간될 예정이다. 그의 대표적 산문들로 엮은 단행본도 함께 출간된다.

쓰러지기 전 약속에 따라 11일 제19회 소월시문학상 특별상 상금 300만원을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전액 내 놓기도 했다. 큰딸 영희씨는 “건강하게 생활하다가 갑자기 쓰러졌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무런 유언을 남기지 않으셨다”면서 “평소 입버릇처럼 광주 공원묘지의 부인 곁에 묻어 달라고 했다”고 전했다.

문학평론가인 이창민 고려대 교수는 “고인은 역사에서 소외된 자기의 존재가 문학을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역사의 간교한 흐름에 따라 억압된 자, 소외된 자, 배제된 자가 현실로 귀환하는 통로가 문학이라고 생각했다”고 평했다.

○김춘수 시인 연보

△1922. 11. 25 경남 통영 출생

△1939 경기중 4년 수료

△1940 일본 니혼(日本)대 예술학원 창작과 입학

△1942 일본 천황과 총독정치를 비방해 7개월간 헌병대와 경찰서에 유치. 니혼대학 퇴학

△1944 부인 명숙경(明淑瓊) 씨와 결혼

△1946∼51 통영중, 마산중ㆍ고 교사

△1946 ‘애가’ 발표

△1948 첫 시집 ‘구름과 장미’ 펴냄

△1959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펴냄.

△1960∼78 마산 해인대(경남대 전신), 경북대 문리대 교수

△1974 시선집 ‘처용’ 펴냄

△1977 시선집 ‘꽃의 소묘’, 시집 ‘남천(南天)’ 펴냄

△1979∼81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1980 시집 ‘비에 젖은 달’ 펴냄

△1981 제11대 국회의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86∼88 방송심의위원장, 한국시인협회장

△1991 시론집 ‘시의 위상’, 시집 ‘처용단장’ 펴냄

△1992 시선집 ‘돌의 볼에 볼을 대고’ 펴냄, 은관문화훈장 수상

△1993 시집 ‘서서 잠자는 숲’, 산문집 ‘여자라고 하는 이름의 바다’ 펴냄

△1994 ‘김춘수 시전집’ 펴냄

△1997 장편소설 ‘꽃과 여우’ 펴냄. 제5회 대산문학상 수상

△1998 제12회 인촌상 수상

△1999 시집 ‘의자와 계단’ 펴냄, 부인 명숙경 여사와 사별

△2002 시집 ‘쉰한 편의 비가’ 펴냄

△2004 ‘김춘수 전집’ 펴냄, 제19회 소월시문학상 특별상 수상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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