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미국 서점가에서는 ‘새벽에서 데카당트까지’라는 800여 쪽의 책이 장기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화제가 됐다. 지금도 꾸준히 팔리고 있는 이 책은 서구의 문화사 500년을 조명한 저작으로 저자는 올해로 95세를 맞은 자크 바전 전 컬럼비아대 교수. 그는 역사학자이자 문화비평가로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는 ‘현역’이다. 서구 500년의 문화사를 꿰뚫어 보는 그의 안목은 바로 그의 연륜에서 나온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철학자 중 한 사람인 폴 리쾨르 전 파리4대학 교수는 87세였던 작년 ‘기억, 역사, 망각’이라는 역저를 냈다. 현재 국내에서 이 책이 번역 중인 것을 알고는 직접 교정한 원고를 다시 보내오기도 했다. 그는 현재 ‘성서해석학’을 주제로 한 저서를 집필 중이다. 기호학, 정신분석학, 구조주의, 현상학, 해석학, 종교학 등 현대 사상의 주요 경향을 두루 섭렵하며 방대한 지적 응집력을 보여주는 그의 작업은 오랜 기간의 학문적 축적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중국에서 베이징도서관 관장, 베이징대 및 중국사회과학원 박사지도교수,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등으로 정력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는 런지위(任繼愈) 교수. 그는 86세의 나이에도 불교를 비롯한 종교 연구를 중심으로 중국철학사 전반을 넘나들며 폭넓은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1998년 ‘天人之際(천인지제)’라는 저서를 낸 후 기존 저서들의 수정증보 작업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여러 학자들과의 공동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노익장을 발휘하는 데는 나이와 관계없이 연구하는 학계의 분위기와 학자들의 연구를 지원하는 사회적 환경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국의 경우 대학교수의 정년은 일반적으로 70세. 1980년대부터는 그나마 공식적인 정년마저 폐지되는 추세다. 연구할 능력이 있는 한 사회에서 뒷받침 하는 것이 그 사회에 유익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특히 오랜 연륜을 필요로 하는 인문학의 경우는 정년이 무의미하다는 게 중론이다. 물론 무섭게 성장하는 신진학자가 있다면 그 자리는 새로운 사람에게 양보되기 마련이다. 지식인들을 우대하는 풍토가 깊이 뿌리내린 프랑스는 물론,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경우에서도 능력 있는 학자에게는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죽을 때까지 생계가 보장된다.
미국 프린스턴대 고등학문연구소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세계적인 인류학자 클리포드 기어츠는 76세. 프랑스의 저명한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인 장 프랑스와 리오타르는 78세, 장 보드리야르는 73세, 지금도 미국 정부의 대외정책을 강력히 비판하고 있는 세계적인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는 74세다. 적어도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70대는 기본적으로 학자로서 완숙한 연구성과를 한창 내놓을 나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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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하면 국내의 학자들은 50대 후반만 들어서도 새로운 연구를 접고 원로교수 대접받는 것을 당연시 하는 경우가 많다. 교수의 정년이 65세인데다 정년퇴임한 학자들의 학문적 역량을 사회적으로 활용하도록 하는 시스템도 없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연구를 강요할 수도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국내에서는 70세가 넘어 연구활동을 제대로 하고 있는 학자는 손에 꼽을 정도다. 6개월에 한번씩 발간되는 역사대중지 ‘한국사시민강좌’를 주관하고 있는 이기백(78) 서강대 명예교수, 외로이 개인 연구실을 지키며 매년 주목할 만한 저서를 내놓고 있는 최재석 고려대 명예교수(76)와 김용섭 연세대 명예교수(71), 세계역사학대회의 한국유치 준비에 분주한 차하순 서강대 명예교수(73) 등이 눈에 띄는 정도다.
중국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현대사의 격변기를 살다가 1990년 95세에 세상을 떠나던 날까지 7권에 달하는 ‘중국철학사신편(中國哲學史新編)’의 원고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펑여우란(馮友蘭) 전 칭화(淸華)대 교수. 그는 학자로서의 자신을 삶을 비유하며 만당(晩唐)의 시인 리상인(李商隱)의 무제시(無題詩) 한 구절을 읊곤 했다.
“봄 누에는 죽어서야 실 뽑기를 그치고(春蠶到死絲方盡·춘잠도사사방진)/촛불은 재가 되어야 눈물 비로소 마르리(蠟燭成恢淚始乾·납촉성회루시건).”
김형찬·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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