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딸(22)의 입에서 터져 나온 거친 욕설에 김순애(가명·57·서울 관악구 남현동) 씨는 순간 멍해졌다. 어느 순간 딸이 밤새 거실을 들락거리기에 “잠을 못 자는 거냐”고 했더니 폭언이 쏟아진 것. “엄마인 나도 아프고…동생은 어리고…자기가 생계를 꾸려야 한다는 부담이 너무 크다 보니 그런 소릴 했겠지….”
김 씨는 목소리처럼 가늘게 떨리는 손을 눈가로 가져갔다. 김 씨의 양 손목엔 파스가 떨어질 날이 없다. 퇴행성관절염과 손목 염증을 앓고 있는 김 씨는 한 자세로 오래 앉아 있을 수 없고 손목이 시큰거려 파스 없인 일할 수 없다. 한 달에 보름 정도 반나절씩 설거지나 야채를 다듬고 일당으로 3만8000∼4만 원을 받아 한 달 수입은 60만 원 정도다. 그중 20만 원가량이 김 씨와 만성 비염을 앓고 있는 아들(16)의 약값으로 들어간다.
○ 결혼과 사업 실패로 가파른 내리막길
두 번 결혼과 이혼. 첫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은 안정적인 직장에 결혼도 했지만 다른 남자와 결혼해 가정을 꾸린 엄마를 외면했다. 둘째 남편과도 이혼하고 딸과 아들을 데리고 살던 김 씨는 7년 전 가게가 망한 뒤 빚쟁이에게 쫓기며 전 재산을 날렸다. 갈 곳이 없어진 김 씨는 첫째 딸에게 “한 번만 도와 달라”고 애원했다. 딸은 “모녀지간의 인연을 끊자”며 2000만 원을 건넸다. 그렇게 2년 전 월세방 보증금을 마련했다.
세 가족이 북향인 집에서 가스 난방 한 번 틀지 않고 전기장판만 약하게 틀면서 겨울을 두 번 났지만 올해 8월에만 해도 김 씨가 손목 통증으로 일하지 못하는 날이 많아지면서 55만 원인 월세는 8개월 치가 밀렸다. 쫓겨날 처지였지만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위기가정지원사업 지원 대상자로 선정돼 200만 원을 받아 밀린 월세 중 석 달 치를 내고 나머지는 생활비로 충당했다. 하지만 다시 월세는 밀리기 시작했고 지난달 집주인이 다시 집을 비워 달라고 요구했다. “아들이 고등학교 배정받고 입학할 때까지만, 4월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사정해 연장했지만 보증금에서 월세가 빠져나가고 있어 내년 봄에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한 처지다. ○ 엄마-아들에 이어 무너진 딸
아들은 어려운 형편을 그래도 이해했지만 사춘기였던 딸은 가정의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중학교를 중퇴하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장을 땄다. 방에서 나오지 않는 날이 많아졌고 기르는 고양이만 애지중지했다. 숫기 없는 딸이 생활비라도 벌려고 옷가게에서 한 달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많이 힘들어 그런 것일 뿐이라고 김 씨는 생각했다.
두 달 새 7kg이 빠진 딸은 잠을 이루지 못해 술을 사다 마셨고, 엄마 김 씨에게 수면 유도제를 사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지난달 딸을 데리고 동네 내과로 갔더니, 우울증인 것 같다며 신경정신과로 가라 하더라고요.”
인근 종합병원에 다녀온 뒤 김 씨는 이달 말로 심리검사 일정을 잡았다. 검사비 40만 원이 없어 한 달간 아르바이트를 바짝 할 심산으로 한 달 뒤로 잡았다. 선의관악종합사회복지관 조동수 팀장은 “의료비와 학비 지원이 되는 기초생활수급자보다 김 씨처럼 장성한 자식들이 있어 기초생활수급 대상이 못 되는 사람들의 삶이 더 팍팍한 경우가 많다”며 안타까워했다. 위기가정 지원사업 신청 문의는 중앙위기가정지원 콜센터(1899-7472)로, 후원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콜센터(080-890-1212)로 문의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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