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뒷목 잡는 팀장의 “딱 한잔만”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1일 03시 00분


[2020 행복원정대 : ‘워라밸’을 찾아서]1부 완생을 꿈꾸는 미생들
<3> 오늘 저녁도 회식






3회 ‘헤어진 연인들(feat 회식)’ 편은 ‘우리사이느은’으로 큰 인기를 얻은 이연지 작가가 입사 5년 차 회사원 박지현(가명)
 씨의 애환을 듣고 영감을 얻어 그렸다. 마지막 컷의 ‘빌런(villain)’은 ‘악당’이란 뜻이다. ‘어벤져스’ 등 히어로물이 
인기를 얻으면서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어가 됐다.
3회 ‘헤어진 연인들(feat 회식)’ 편은 ‘우리사이느은’으로 큰 인기를 얻은 이연지 작가가 입사 5년 차 회사원 박지현(가명) 씨의 애환을 듣고 영감을 얻어 그렸다. 마지막 컷의 ‘빌런(villain)’은 ‘악당’이란 뜻이다. ‘어벤져스’ 등 히어로물이 인기를 얻으면서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어가 됐다.

“제 사생활을 배려하지 않는 직장도 차버리고 싶어요!”

얼마 전 헤어진 남자친구 이야기를 묻는 상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꾹 참았다. 입사한 지 5년. 그동안 2번 연애를 했다. 결론은 같았다. “그 회사엔 ‘회식 빌런(악당)’들만 사냐?” 이 한마디를 남기고 떠나갔다.

내 이름은 박지현(가명·29·여). 대학 졸업과 함께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찾아 이 회사에 입사했다. 정년 보장, 정시 퇴근, 적당한 근무강도…. 워라밸 ‘3종 세트’를 완벽히 갖췄다. 하지만 그땐 몰랐다. 3종 세트를 단박에 무력화할 엄청난 존재가 있다는 것을. 바로 저녁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회식 폭격’이다.

“근처에서 딱 한잔만 하고 가자.”

입사 한 달째, 야근보다 더 끔찍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퇴근 때마다 ‘누가 팀장 입 좀 막아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누가 팀장 입을 막겠는가. “딱 한잔만”은 늘 1시간 이상 이어졌다. 신입사원의 숙명이라며 억누른 불만을 1년 만에 터뜨렸다. “바로 집에 가면 안 될까요? 몸이 너무 힘들어요.” 돌아온 답변에 기가 막혔다. “일만 시키는 사람보다 낫잖아? 고맙지도 않나 보네.” 팀장은 자신의 부하사랑을 몰라주는 게 억울하다며 자화자찬을 덧붙였다. “이렇게 맛있는 거 잘 사주는 상사 봤어?”

입사 2년이 지나 ‘회식 빌런’ 팀장이 다른 부서로 옮겼다. ‘오∼ 신이시여!’ 드디어 내 인생에도 ‘쉼표’가 찍힐 줄 알았다. 착각을 깨는 데 하루면 족했다. 새 팀장은 진정한 ‘회식 빌런’이었다. 소위 ‘실세’답게 빵빵한 법인카드와 강력한 인사권을 양손에 쥔 인물이었다.

그는 거의 매일 퇴근 한 시간 전 “오늘은 뭐 먹지?”라며 번개 회식을 잡았다. 그에게 부원들의 저녁 스케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회식을 소집하면 급히 남자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빠, 오늘도 회식이래. 다음에 봐….”

간단히 저녁만 먹을 것 같던 회식은 2차 호프집, 3차 노래방으로 이어졌다. 졸음을 쫓아내며 술잔을 기울이는 동료들의 눈가엔 다크서클이 문신처럼 새겨졌다. 거나하게 취한 팀장은 술잔을 들고 말했다. “어차피 대리기사 부를 거잖아? 대리비 나가는 건 똑같으니 끝까지 달리자!”

회식이 끝나면 새벽 1시가 되기 일쑤였다. 한 달에 최소 6번, 연말연시엔 이런 상황이 무한 반복됐다. 심할 때는 주당 회식 시간만 20시간쯤 된 것 같다.

동료들은 회식 빌런에게 반격을 꾀하기도 했다. 누군가는 불참으로 시위했고, 또 누군가는 당당하게 ‘회식 구조조정’을 외쳤다. 한 신입사원의 어머니는 “도대체 그 회사는 뭐 하는 곳이기에 매일같이 술을 먹이냐”며 항의한 일도 있다.

그렇다고 위축되면 애초 빌런이 아니었을 터. 그들은 오히려 “비싼 돈 들여 맛있는 거 먹이고 술 사주며 업무 스트레스를 풀어주는데 군소리가 많다”며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그들의 ‘회식 예찬 어록’은 눈부시게 화려했다. “임원이 되고 싶어? 그럼 ‘술상무’부터 해야지!” “회식은 조직생활의 기본이야. 이게 싫으면 나가서 닭이나 튀기든지….” 또 누군가는 그랬다. 회식에는 좌파와 우파가 없다고. ‘한 식구’끼리 밥 먹고 시간 보내는 건 한국의 미풍양속이 아니냐면서….

고생한 직원을 격려하려는 상사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도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취업포털 인크루트 설문조사에서 ‘사양하고 싶은 복리후생’ 1위로 꼽힌 것은 바로 ‘술자리 회식’(27%)이다.

오늘도 빌런들은 “고생한 사람들끼리 한잔 하자”며 우리의 퇴근길을 막아선다. 한번쯤 용기 내 외치고 싶다. “열심히 일한 대가가 꼭 회식이어야 하나요? 차라리 돈과 휴식으로 보상받고 싶어요.”

▼ “노래방까지 화려한 2차” 찬성 0.5%뿐 ▼

직장인 70% “회식탓 일상에 지장… 단합보다 서열 반영 불편한 자리”


동아일보와 직장인 익명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인 ‘블라인드’가 1월 24∼26일 795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 ‘회식 때문에 일상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응답은 69.8%에 달했다.

‘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의 저자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이를 두고 ‘착취 회식’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직장 동료를 ‘식구’에 비유하는 한국에선 함께 밥을 먹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며 “회식의 순기능을 무시할 수 없지만 일상에 피해를 주는 수준의 회식문화는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주 교수는 “무엇보다도 판공비, 회의비 명목으로 책정된 예산 항목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팀의 단합을 명목으로 주어진 예산과 법인카드가 과도한 회식문화를 조장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돈의 권력’은 회식 자리에서도 영향을 미친다. 주로 비용을 내는 사람이 정중앙에 앉는다. 주 교수는 “이런 회식은 친목과 단합보다 업무의 연장선 역할을 할 뿐”이라고 했다. 결국 직장 내 서열이 고스란히 반영되고, 아랫사람들이 불편함을 누른 채 앉아있어야 하는 회식이 바로 ‘착취 회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본처럼 회식을 하더라도 2, 3차까지 이어지는 자리는 더치페이를 한다면 개인의 참여 의사가 더 존중받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렇다면 적정한 수준의 회식은 어느 정도일까. ‘블라인드’ 조사 결과 ‘저녁식사 1차만’(45.7%)을 가장 선호했다. ‘저녁 대신 점심으로’(34.5%)가 2위였다. 저녁식사 뒤 노래방 등 ‘화려한 2차’를 즐기고 싶다는 직장인은 0.5%에 그쳤다.

▼[노동잡학사전]회식중 부상-사망은 산재… 귀가하다 사고 나도 인정▼

‘사업주가 주관하거나 사업주의 지시에 따라 참여한 행사나 행사준비 중에 발생한 사고.’

산업재해보상보험법 37조 1항에 규정된 ‘업무상 사고’ 유형의 일부다. 여기서 사업주란 직장 상관을 포함한다. 상관이 주관한 회식 도중 다치거나 사망하면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다만 회식 중이라도 자발적으로 술을 마시다가 다쳤다면 산재로 인정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다. 회식 뒤 집에 가다가 사고를 당했다면 ‘업무상 사고’는 아니다. 다만 올해 1월 1일부터 ‘출퇴근 재해’를 시행하고 있어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회식 뒤 평소 자신이 이용하는 경로와 방법으로 귀가하다가 사고를 당했다면 산재로 인정받는다. 만약 중간에 친구를 만나 술을 한 잔 더 마신 뒤 귀가 중 사고가 났다면 산재로 인정받을 수 없다.

김수연 기자 sykim@donga.com /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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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회사#서열#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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