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같은 연수, 억지 춘향 장기자랑… 나 취직했다! 나 사표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13일 03시 00분


[2020 행복원정대 : ‘워라밸’을 찾아서]1부 완생을 꿈꾸는 미생들
<7> 입사하자마자 퇴직 준비

‘불참은 없다. 전원 참석!’

입사한 지 한 달 만인 2016년 중반경 총무팀에서 받은 e메일은 간결하고 명료했다. 신입사원인 우리의 임무는 회사 체육대회에서의 장기자랑. 혹독한 취업관문을 거치느라 노는 법조차 잃어버린 미생(未生)들에게 담당자는 “분위기가 썰렁해지면 곤란하다”고 엄포를 놓았다. 업무를 마친 우리들은 한밤중에 모여 춤을 연습했다. 아이돌 춤을 따라 하느라 야근을 하게 될 줄이야….


연습하느라 풀어놓은 넥타이를 보니 입사 첫날이 떠올랐다. “근속연수 35년을 채우겠습니다. 신입사원 박정후(가명·30)입니다.” 회사 로고와 같은 색깔의 넥타이를 하고 간 나의 자기소개에 임원들은 박장대소했다. 그땐 진심이었다. 40여 곳을 탈락한 끝에 합격한 이 회사에 뼈를 묻을 각오가 돼 있었다. 하지만 회사는 엉뚱한 곳에 ‘신입의 열정’을 요구했다.

1000여 명이 모인 회사 체육대회의 하이라이트는 ‘신입사원 장기자랑’이었다. ‘방탄소년단’이 될 수 없다면 선택은 하나였다. 반짝이 재킷과 핫팬츠를 입고 우스꽝스러운 ‘몸개그’로 신고식을 했다. ‘여기는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괴감이 이후 1년 넘게 나를 괴롭혔다.




7회 ‘취뽀생? 퇴준생!’ 웹툰은 ‘규찌툰’ 시리즈로 유명한 남현지 작가가 과도한 신입교육과 단체활동으로 워라밸을 잃고 사표를 쓴 회사원 박정후(가명·30) 씨의 사연을 토대로 그렸다.
7회 ‘취뽀생? 퇴준생!’ 웹툰은 ‘규찌툰’ 시리즈로 유명한 남현지 작가가 과도한 신입교육과 단체활동으로 워라밸을 잃고 사표를 쓴 회사원 박정후(가명·30) 씨의 사연을 토대로 그렸다.
돌이켜보면 입사 직후 연수원 생활도 다르지 않았다. 10일간 외부와 차단된 채 합숙훈련을 했다. 아침엔 구보, 저녁엔 점호를 하는 게 흡사 군대 같았다. 주말 외출도 금지됐다. 오죽하면 취업사이트에 이런 질문들이 올라올까. ‘가족 결혼식인데 외출하겠다고 말하면 찍힐까요?’ ‘가장 친한 친구가 사고로 죽었어요. 연수원에서 외출을 허락할까요?’

경조사 참석조차 눈치를 봐야 하는 연수원에서 배운 건 업무가 아니었다. 신입연수란 창업주의 정신과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세뇌당하는 과정 같았다. ‘창업주의 자서전을 읽고, 그 일화를 연극으로 만드시오.’ 이런 과제를 받을 땐 한숨만 푹푹 나왔다.

입사 초기 이 고비만 넘기면 ‘정상적인 회사생활’이 기다릴 줄 알았다. 물론 착각이었다. 근로계약서상 출근시간은 오전 8시지만 간부들은 ‘새벽 별 보기 운동’을 하듯 새벽 출근을 미덕으로 여겼다. 업무는 오전 9시 넘어 시작하더라도 사무실 ‘착석’은 오전 7시를 넘겨선 안 됐다. 신입사원 정신교육을 한다며 새벽 조깅을 하는 회사도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지난해 한 동료가 ‘독립운동’을 하는 심정으로 용기를 냈다. ‘사장과 사원대리급 사원 간담회’에서다. 사장은 어떤 건의사항이라도 허심탄회하게 해 달라고 했다. 동료는 “해외 영업 업무로 오전 5시경 출근할 때가 있다. 그때만이라도 오후 5시에 퇴근하게 해 달라”고 말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이어진 사장의 답변에 모두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자네는 회사에 대한 희생정신이 없군.”


입사한 지 1년 반이 된 올해 초 나는 결국 사표를 냈다. 업무효율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채 윗사람 보여주기식 새벽출근과 야근, 단체행사의 강압적 참여에 심신은 지쳐갔다. 성과 없이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만 갉아먹는 행동을 강요당할 때마다 ‘퇴사 마일리지’가 쭉쭉 쌓였다.

어쩌면 열심히 업무를 배우겠다며 눈을 반짝이던 신입사원에게 반짝이 의상을 나눠주며 야간 춤 연습을 시킬 때 이미 퇴사를 예약했는지 모른다. 실제 몇몇 동기가 그 일 이후 이직을 공공연히 얘기했다. ‘퇴준생(퇴직준비생)’ 중 내가 먼저 실행에 옮겼을 뿐이다. 누군가는 우리를 향해 나약하고 인내심이 부족하다고 손가락질을 할지 모른다. 하지만 목적조차 분명치 않은 강압적 교육과 단체활동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게 패기이고 열정일까. 그것을 미생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기엔 우린 너무 젊다.


군대식 신입교육… “애사심? 관두고 싶어져”
지난해 말 KB국민은행이 ‘신입사원 연수’ 중 100km 행군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여직원에게 피임약을 권해 물의를 빚었다. 행군 때 생리로 고생하지 않도록 한 조치지만 오히려 인권 침해 논란으로 번졌다.

‘신입교육’이란 이름으로 진행되는 군대식 점호 등 무리한 훈련에 사회 초년생들의 불만이 크다. 지난달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회원 43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60%인 261명은 기업연수원 입소 경험이 있었다. 이 중 34%는 연수원 교육을 받은 뒤 입사를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거나 실제 퇴사를 했다고 응답했다.

신입사원들은 ‘매 시간 꽉 채워진 빈틈없는 일정’(18%) ‘집체교육 등 지나친 단체생활 강조’(12%) ‘이른 기상시간’(10%) 등에 불만을 나타냈다. 이들은 입사 초부터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회사의 강압적 교육방식을 ‘갑질’에 비유했다.

대기업 A사 관계자는 군대식 신입교육이 관행적으로 내려오는 이유에 대해 “사람을 뽑았으면 회사도 그 사람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힘든 교육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사원이 있다면 일찌감치 걸러내는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 B기업 인사 담당자는 “함께 일하려면 기업의 철학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보니 기업도 많은 비용을 들여 신입연수를 하는 것”이라며 “다만 장거리 행군 등 무리한 프로그램은 없애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신창현 의원은 근로자의 단결심 고양과 체력단련 등을 명목으로 자행되는 군대식 훈련 프로그램을 실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신 의원은 “직원들의 자율성과 인권을 존중하는 기업문화가 정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동잡학사전 : 수습사원의 법적 신분
최저임금의 90% 보장…이유없이 해고 못해

근로기준법에 수습사원 규정은 별도로 없다. 수습기간과 처우는 사업장마다 근로계약서나 취업규칙, 단체협약으로 정한다. 수습사원의 월급은 일반 직원보다 적어도 상관없지만 최저임금의 90%는 돼야 한다. 올해 최저월급(하루 8시간 근무 기준)은 157만3770원이므로 141만6393원 이상은 줘야 한다.

수습사원도 엄연한 근로자다. ‘근무태만’ 같은 정당한 사유(근로기준법 23조) 없이 마음대로 해고할 수 없다. 특히 최저임금을 받는 근로자는 최저임금법 5조에 따라 수습기간이 3개월 이내여야 한다. 1년 미만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를 상대로는 수습기간을 둘 수 없다. 월급 감액도 허용하지 않는다. 단기 근로자를 대상으로 수습기간을 둬 월급을 깎는 ‘꼼수’를 막기 위한 조치다.

김수연 suyeon@donga.com·신규진 기자
김수연 sykim@donga.com·서동일 기자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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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사원#퇴직#장기자랑#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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