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행복원정대:워라밸을 찾아서]3부 해외에서 만난 ‘워라밸 보석’
<4>원하는 시간에 일하는 네덜란드 워킹맘
“정규직요? 저는 정규직으로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는걸요?”
지난해 11월 13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세계무역센터(WTC). 시간제(주당 32시간) 사무직으로 일하는 안야 더용 씨(47·여)는 기자가 “아이들이 좀 더 크면 정규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고 묻자 고개를 갸우뚱했다. 정규직에 비해 임금과 처우가 낮은 한국의 시간제 근로자라면 누구나 정규직을 꿈꾸기 마련이다.
하지만 네덜란드는 달랐다. 더용 씨는 “시간제 근무가 육아에 큰 도움이 된다”며 “네덜란드는 시간제 일자리가 보편적이고, 차별이 전혀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시간제로 일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 두 마리 토끼 잡는 시간제 근무
더용 씨는 WTC에서 19년간 일하며 아이를 2명 낳았다. 아이를 갖기 전 3년간 풀타임으로 일했지만 아이를 낳은 이후 시간제를 택했다. 직장과 가정, 일과 육아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기 위해서다. 물론 아이들은 늘 엄마가 목마르다. 더용 씨가 “엄마가 집에 좀 더 있으면 좋겠어?”라고 물으면 아이들은 주저 없이 “네!”라고 답한다. 그래도 그는 현재의 일자리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
“일할 때는 아이와 남편에게 죄책감이 들고, 집에서는 일에 대한 죄책감이 들어요. 가정과 직장은 내게 동일한 가치를 갖고 있어요. 아이들 친구의 부모도 대부분 맞벌이를 하고 있어 아이들도 제 선택을 이해하는 편이에요.”
네덜란드의 시간제 일자리는 일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만큼 정규직보다 임금은 다소 적다. 하지만 다른 처우나 복지 혜택은 동일하다. 커리어도 착실히 쌓을 수 있다. 특히 자신의 선택에 따라 풀타임과 시간제를 언제든지 넘나들며 육아와 일을 병행할 수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이 사실상 무의미한 셈이다.
네덜란드의 시간제 근로자 비율은 전체 근로자의 37.4%에 이른다. 10명 중 3, 4명이 시간제 근로자일 정도로 매우 보편화된 근로형태인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네덜란드는 시간제 근로자 비율이 가장 높다.
‘워킹맘’들이 일하는 시간에는 정부와 기업이 합심해 만든 유치원과 학교에서 아이들을 돌본다. 유치원과 학교는 부모가 퇴근할 때까지 아이들을 철저하게 책임진다. 더용 씨는 “아이들이 유치원과 학교 생활을 정말 좋아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다”며 “은행원인 남편도 정말 바쁘지만, 육아와 집안일은 철저하게 50 대 50으로 나눠서 한다”고 말했다.
○ 육아휴직 대신 근로시간 단축
WTC의 회계담당자로 아이가 2명인 에스터르 디스베르흐 씨(40·여)는 일주일에 나흘(32시간)만 일한다. 매주 4일은 친정 엄마와 보육시설에 아이들을 맡기고, 나머지 3일은 자신이 직접 돌보는 것이다. 하지만 디스베르흐 씨는 시간제가 아니라 정규직이다. 네덜란드 노동법상 법정근로시간은 주 40시간(주 5일)이다. 그렇다면 디스베르흐 씨는 정규직임에도 어떻게 법정근로시간보다 적게 일할 수 있을까?
해답은 네덜란드의 독특한 육아휴직제에 있다. 네덜란드 정부는 여성 근로자가 아이를 낳으면 육아휴직과 ‘근로시간 단축’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육아휴직을 가지 않는 대신에 주 4일 또는 주 3일만 일하는 것이 가능하다. 디스베르흐 씨는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싱글맘’이어서 일을 그만두거나 육아휴직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근로시간 단축을 통한 ‘시간제 전환’이다.
이 제도는 디스베르흐 씨 같은 싱글맘들에게 특히 유용하다. 육아휴직에 들어가면 국가가 육아휴직 급여를 주지만 직장 월급보다 적을 수밖에 없다. 싱글맘 입장에서는 육아휴직을 하는 것보다 근로시간 단축을 선택하는 게 경제적으로 훨씬 유리한 셈이다.
디스베르흐 씨는 “네덜란드에는 ‘워킹맘’이라는 말 자체가 없다. 일을 하지 않는 엄마가 거의 없기 때문”이라며 “같은 이유로 전업주부라는 말도 거의 쓰지 않는다. 모두가 일하고, 모두가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했다.
○ 유연한 기업 문화도 필수
정부가 아무리 제도를 촘촘하게 마련해도 기업의 조직문화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워라밸을 구현하기 힘들다. 네덜란드 역시 제도의 힘만으로 워라밸이 자리 잡은 것은 아니다. 네덜란드에서 일하고 있는 한국 청년들은 “근무시간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점이 네덜란드 워라밸의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입을 모은다.
프랑스 파리에서 일하다가 암스테르담의 컨설팅 회사인 ‘액센츄어’에 취업한 임혜성 씨(31·여)는 “하루 8시간 근무가 정해져 있지만, 각자 사정에 맞춰 근로시간을 유연하게 운영할 수 있다”며 “상사 눈치를 보지 않고 업무 중에도 개인 용무를 볼 수 있다. 그 대신 그만큼 더 일하면 그뿐”이라고 말했다.
암스테르담의 또 다른 컨설팅 회사인 ‘언스트영’에 다니는 권슬기 씨(35·여)는 “한국에서는 내 일이 곧 내 삶이었다. 일을 사랑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었다”며 “여기서는 일과 삶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일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또 다른 내 삶을 즐길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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