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투 더 동아/9월 1일]소련군, 대한항공 여객기 미사일 격추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1일 14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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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1년 전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에서 카메라에 담긴 사고기. 동아일보DB
사고 1년 전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에서 카메라에 담긴 사고기. 동아일보DB


1983년 9월 1일 미국 뉴욕을 출발해 앵커리지를 거쳐 서울을 향해 날아오던 대한항공 007편이 옛 소련 영토인 사할린 근처에서 사라졌다. 이미 당시 언론에서 조심스레 예측한 것처럼 이 B747 여객기는 소련 방공군 수호이(Su)15 요격기가 쏜 미사일을 맞고 추락했다. 그 결과 이 비행기에 타고 있던 269명(승객 246명, 승무원 23명)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은 항공 사고로 남아 있다.



소련군이 미사일을 발사한 이유는 이 비행기가 자국 영토를 침범했기 때문이었다. 냉전이 한창이던 당시에는 미군 정찰기가 민항기로 위장해 소련 영공을 침범하는 일이 흔했다. 이 사할린 인근 상공을 아예 ‘공중 전쟁터’라 부를 정도였다. 이 때문에 당시 소련 정보부는 각 방공 부대에 미군 정찰기가 영공을 넘어 오면 격추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사실 이날도 이 지역을 정찰하던 미군 RC135 정찰기를 소련군 레이더가 포착한 상태였다. RC135도 B747처럼 보잉사에서 만든 B707을 개조한 비행기였다. RC135에 이어 곧바로 대한항공기가 레이더에 잡혔기 때문에 소련군에서 착각할 수 있던 상황이었다.

B707을 개조해 만든 RC135 정찰기. 미국 국방부 홈페이지.
B707을 개조해 만든 RC135 정찰기. 미국 국방부 홈페이지.


소련에서 처음부터 곧바로 미사일을 쏜 건 아니었다. 소련군은 처음에 요격기 날개에 달린 경고등을 깜빡여 유도 착륙을 시도했지만 대한항공기에서 반응이 없었다. 이어 조명탄을 네 차례 발사했지만 마찬가지로 대한항공기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날 요격기를 조종한 켄나디 오시포비치 소령은 나중에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내가 조명탄이 아니라 철갑탄을 쐈다는 주장도 있는데 철갑탄을 쏠 때도 불꽃이 일기 때문에 밤에 식별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련군에서 미사일을 발사하기 결정한 제일 큰 이유는 대한항공기가 고도를 높이면서 속력을 줄였기 때문이다. 소련군에서는 이를 공격 행위라고 판단했다. 전투기가 느린 속도로 여객기를 따라 가다가는 실속(失速)해 추락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었다. 전투기 비행 특성을 잘 아는 군 조종사가 대한항공 비행기를 몰고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정말 민항기인 줄 몰랐을까

이날 이후 오시포비치 소령에게는 똑같은 질문이 따라다닌다. “격추한 비행기에 승객이 타고 있다는 걸 알았는가.” 대답도 똑같다. “몰랐다.” 오시포비치 소령은 “유도 착륙을 시도하려고 대한항공기 300m 옆까지 날아갔지만 창문 사이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겉모습은 여객기였지만 여객기를 개조한 정찰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문제는 당시가 어떻게든 상대를 ‘악마’로 만들어야 하는 냉전시대였다는 것. 1991년 3월 24일 동아일보 이낙연 도쿄(東京) 특파원(현 국무총리)은 오시포비치 소령이 일본 ‘TV 아사히’에 출연해 “당시 대한항공기는 항공등과 충돌방지등을 켜고 있었으며 이런 등을 켜는 것은 민항기”라며 “그 당시 자신은 대한항공기가 틀림없이 민간용 수송기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오시포비치 소령이 이 보도에 대해 해명한 건 6년 뒤였다. 1997년 9월 1일 동아일보 반병희 모스크바 특파원과 전화 인터뷰에서 “물론 충돌방지등이 켜져 있는 것을 봤다. 그러나 충돌방지등은 민항기뿐 아니라 수송기를 비롯해 다른 군용기도 밝힌다. 따라서 전투기가 아닌 것은 확실했지만 그렇다고 민항기였음을 알았다는 것은 아니다”며 “지상 귀환 후 결과를 조사하던 방공군 사령부에서 통보해줘 (민항기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당시 대한항공기가 꼬리날개에 있던 조명등을 켜지 않은 것도 오시포비치 소령을 착각하게 만들었다. 이 등을 켜 놓았다면 로고를 식별해 민항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겠지만 당시 대한항공기는 이 등을 끄고 운항 중이었다. 대한항공에서 ‘공중에서는 충돌 위험이 없다’는 이유로 이 등을 켜지 말라고 조종사들에게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두고 “전구 수명을 늘려 지출을 줄이려는 목적이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원래 B747은 이렇게 조명등을 켜도록 돼 있지만 사건 당시에는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게 오시포비치 소령 주장이다. 당시 대한항공에서도 이 등을 켜지 말라고 조종사들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위키피디아 캡처.
원래 B747은 이렇게 조명등을 켜도록 돼 있지만 사건 당시에는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게 오시포비치 소령 주장이다. 당시 대한항공에서도 이 등을 켜지 말라고 조종사들에게 지시했다고 한다. 위키피디아 캡처.


오시포비치 소령은 “비행기에 표시된 어떤 표시나 글씨도 보지 못했다”고 주장하면서 “만약 사람이 탄 여객기라고 생각했다면 (미사일을) 쏘지 않았을 것이다. 여객기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면 상부에 보고하고 격추에 분명히 반대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왜 소련 하늘로 날아갔을까

오시포비치 소령은 사건 발생 후 30년이 지난 2013년까지도 “내가 격추한 비행기는 정찰기라고 아직도 확신한다. 대한항공기는 미군에서 격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그의 말을 모두 믿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확실한 건 이 대한항공기가 소련 영공에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이 비행기는 왜 적국 영공에 들어갔던 걸까.

당시 대한항공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예상 비행 노선을 벗어나기 시작했으며, 격추 당시에는 계획보다 약 600㎞ 떨어진 지점을 날고 있었다.
당시 대한항공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예상 비행 노선을 벗어나기 시작했으며, 격추 당시에는 계획보다 약 600㎞ 떨어진 지점을 날고 있었다.


당시 대한항공기는 천병인 기장(당시 45세)이 조종간을 잡고 있었다. 천 기장은 공군 시절 곡예비행단원으로 활동할 만큼 조종에 능했고, 대한항공 입사 후에도 대통령 전용기를 두 번 조종할 만큼 능력을 인정받았던 인물이었다. 엘리트 중 엘리트 조종사였던 것이다. 그랬던 천 기장이 수없이 다닌 항로를 이탈했던 이유는 뭘까.

현재까지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는 가설은 좌표 입력 실수다. 당시 비행기는 관성항법장치(INS·Inertial Navigation System)에 의존해 항로를 결정했다. 이 장치를 쓰려면 출발지 좌표를 입력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처음에 이 좌표를 잘못 입력하면 갈수록 예정 항로를 크게 이탈하기 때문에 출발지로 돌아가 좌표를 수정해야 한다.

중국 둥잉 공항에 있는 INS 좌표. 경도와 위도를 나타내고 있다. 인터넷 캡처.
중국 둥잉 공항에 있는 INS 좌표. 경도와 위도를 나타내고 있다. 인터넷 캡처.


출발지로 돌아가려면 기름을 버려야 한다. 비행기 연료탱크는 날개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예상 비행 거리를 다 채우지 못해 탱크에 연료가 필요 이상 많은 상태로 착륙하면 날개가 떨어져 나갈 수도 있다. 당시 대한항공기가 앵커리지로 돌아간다면 연료 2만2500갤런(약 8만5172리터)을 버려야 했다. 이러면 회사 측에 1만9000 달러 정도 되는 손실을 안기게 된다.

격추 당한 대한항공기 뒤에는 이 비행기보다 15분 늦게 앵커리기 공항을 이륙한 대한항공 015기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이 비행기를 조종했던 박용만 기장은 “천 기장이 앵커리지로 돌아갔을 경우 그의 신뢰성과 위신 문제, 회사 측으로부터의 처벌 등을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1988년 4월 18일자 동아일보는 전하고 있다.



대한민국 최고 파일럿이 기초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은 심리가 있었던 데다, 대통령 전용기 기장 심사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걱정, 회사에서 징계도 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으로 천 기장이 수동으로 조종하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이다. 동아일보는 같은 기사에서 “대한항공이 연료를 절약하는 승무원들에게 보너스를 줘 왔다는 ‘입증되지 않은 시사(示唆·귀띔)’도 있다”고 보도했다.

가장 유력한 가설이라고 해도 가설일 뿐이다. 유엔 산하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조사 결과 등을 종합하면 천 기장을 비롯한 조종사들이 INS가 아니라 나침반에 의존해 운행한 건 사실이지만 정확한 원인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이 사건, 그 후…

이 사건으로 일어난 제일 큰 변화로 꼽을 만 한 건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개방이다. GPS는 미국 국방부에서 개발했으며 원래 군사용으로만 활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INS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고 판단한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은 GPS를 민간에게도 제공하겠다고 공표했다. 현재도 GPS 위성은 미국 공군에서 연간 7억5000만 달러 정도를 들여 관리하고 있지만 민간에서는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대한항공은 보잉사와 공동으로 새로운 기체 도색 디자인을 만들었다. 하늘색 디자인이 이때 등장했다. 그 뒤로 글꼴 모양을 바꾸는 등 사소한 부분은 손을 댔지만 큰 틀은 바뀌지 않았다. 대한항공은 1984년에 보잉 747-3B5 3대를 들어오면서 이 기체 디자인을 처음 적용했다. 안타깝게도 이 중 한 대가 1997년 8월 6일 괌에서 추락 사고를 일으키고 말았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대한항공’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하늘색 기체 디자인. 보잉 홈페이지.
이제 많은 사람들이 ‘대한항공’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하늘색 기체 디자인. 보잉 홈페이지.


항공 업계에서는 큰 사고를 큰 겪은 편명은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게 관례다. 이에 따라 대한항공은 김포공항과 뉴욕 존 F 케네디(JFK) 공항을 오가던 007편을 025·026편으로 바꿨다. 현재 인천공항과 JFK 공항을 연결하는 081·082편이 이 노선 후속 이름이다.

ICAO는 사건 이듬해였던 1984년 국제민간항공협정을 개정하면서 민항기는 영공을 침범했다 하더라도 격추하지 못하도록 명시했다. 그러나 미 해군은 1988년 7월 3일 이란항공 여객기를 F14 전투기로 오인해 대공 미사일로 격추시켰다. 이로 인해 자신들이 맹비난하던 소련으로부터 역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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