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에 다 있어” 인수인계 끝… 경험 축적은커녕 매번 원점으로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월 1일 03시 00분


[더 나은 100년을 준비합니다/2020 新목민심서-공직사회 뿌리부터 바꾸자]
<1> 업무 혼자 배우는 ‘독학생 공무원’

#1. 서울시의 6년 차 주무관 A씨의 최근 경험담이다. 인사발령이 나서 새 보직의 전임자를 찾아갔다. 업무 인계는 사실상 한마디가 전부였다. “PC에 다 있어. 읽어보면 알아.” PC에 저장된 인수인계서는 아래아한글 2장 분량. 그는 여느 때처럼 기타자료를 보면서 혼자 업무를 익혀야 했다. A 씨는 “그나마 전임자가 친절하면 PC 모니터에 연락처를 붙여둔다”고 했다.

#2. 지난해 10월 나루히토 일왕 즉위식에 참석한 외교사절 B 씨의 얘기다. 첫날 도쿄 고쿄(皇居·왕궁)에서 1000여 명이 참석한 궁정연회 때 B 씨 탁자에는 7, 8종의 술이 올라와 있었다. 긴장을 풀 수 없던 상황이라 그는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 이튿날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마련한 만찬장. B 씨 탁자에는 술이 한 잔도 없었다. 첫날은 궁내청이, 둘째 날은 총리실이 주최한 자리였는데, 궁내청이 B 씨의 첫날 모습을 세밀하게 관찰해 다른 기관인 총리실 담당자에게 그대로 전달했다고밖엔 해석이 안 됐다. 고지식하리만큼 충실한 인수인계였다.

한국 공직사회는 인사이동이나 조직개편이 상당히 잦다. 하지만 이에 따른 업무 인수인계는 주먹구구로 이뤄진다는 지적이 많다. 젊은 공무원들이 공직의 일상에 좌절하는 이유 중 하나가 부실과 무성의로 화석화된 인수인계 시스템이다.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소하지 않다. 부실한 인수인계는 일반 행정과 정책의 공백으로 이어진다. 민원인의 돈 낭비, 시간 낭비를 초래한다. 고쳐지지 않는 이유는 구조화된 관행과 함께 메뚜기처럼 보직을 옮겨 다녀야 승진이 유리한 인사 시스템 때문이다.

○ 인수인계 없는 ‘독학생 공무원’

정부는 2016년 5월 규제개혁장관회의에서 “국제적으로 안전성이 확보된 원료를 건강기능식품에 쓸 수 있도록 해 관련 산업을 육성하겠다”고 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2018년 4월 “쑥, 로열젤리 등 66종의 원료는 자료를 보완하면 허용할 수 있다”는 용역 결과도 내놓았다. 하지만 지난해 말까지 3년 7개월간 추가 허용된 원료는 1개뿐이다. 식약처 담당자는 “2017년 3월 조직개편으로 주무부서가 바뀌었고, 인사발령도 있어 이 건이 업무과제인 줄 몰랐다”고 했다. 인수인계 과정에서 중요한 규제개선 과제가 공중에 뜬 것이다. 정부만 믿고 새로운 건강기능식품을 만들려고 한 영농법인들은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대통령령에 따르면 공무원은 ‘해당 업무에 관한 모든 사항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도록’ 인수인계를 해야 한다. 한 공무원은 “공무원 사회에서 인수인계가 제대로 안 되는 것은 하루 이틀 된 얘기가 아니다. 공무원이라는 종족의 특성이라는 말이 돌 정도”라고 했다.

인수인계가 요식행위에 그칠 때도 많다. 공개된 업무 목록은 넘겨도 전임자가 익힌 노하우나 인적 네트워크를 넘기진 않는 식이다. 후임자가 업무를 익히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민원인들은 늘 초보 공무원을 대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한 지방 공무원은 온라인 커뮤니티에 “업무를 배울 때 같은 지자체 전임자 말고 다른 시군구에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을 찾아라. 카톡 친구 추가하고 음료 쿠폰이라도 선물하라”고 조언했다. ‘대한민국에서 공무원으로 사는 것’의 저자 이진수 경기 안양시 부시장은 “지식과 경험이 축적되면 더 빠르게 성과를 낼 수 있을 텐데 공무원은 매번 원점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 1, 2년마다 ‘벼락 인사’

인수인계가 부실한 것은 인사이동이 갑자기, 자주 이뤄지기 때문이다. 공무원은 순환보직제로 인해 1, 2년마다 자리를 옮기는데 대개 일주일도 안 남기고 ‘벼락’ 통보를 받는다. 교육부의 한 공무원은 “후임자에게 인계를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새로 발령 난 곳에서 인수를 받아야 하고, 그곳의 전임자도 또 어딘가에서 인수를 받아야 하니 서로 대면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2018년 기획재정부는 국산 포도 출하 시기인 5∼10월에 수입한 칠레산 포도에 대해 관세 12억4000만 원을 잘못 면제했다. 관세를 면제한 2013년부터 4년간 담당 과장은 5차례, 실무자는 8차례 바뀌었다. 드물긴 하지만 전임자의 업무를 깊게 파악하면 과실 책임까지 떠안을 수 있어 일부러 인수인계를 피한다는 말도 있다.

○ 日, 전임-후임자 3주간 인수인계

인사발령 사전 예고가 관행으로 자리 잡은 일본은 업무 인수인계 기간이 길게는 3주다. 특히 일주일은 전임자와 후임자가 대면한 상태에서 인수인계를 한다. 도쿄 중앙부처의 한 사무관은 “이번에 닷새 동안 후임자와 같이 있을 수 있어 인수인계서를 넘겨줬을 뿐 아니라 업무 설명까지 꼼꼼하게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일본 관가에는 전임자와 후임자가 함께 업무 관련자들에게 인사하러 다니는 ‘아이사쓰마와리(애찰回·인사 돌기)’라는 표현도 있다.

상시 인수인계 시스템을 갖추는 경우도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서 근무한 최광해 우리금융경영연구소 대표는 “IMF에선 각자 얻은 정보나 연락처 등을 중앙 컴퓨터에 올려놓게 돼 있다. 누구나 언제든 검색이 가능하니 따로 인수인계를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이어 “평소 보고서에 회의장 바깥 날씨까지 쓰는 경우도 있다. 보고서만 봐도 전임자가 갖고 있는 모든 정보, 숨은 통계까지 알 수 있다”고 했다.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 도쿄=박형준 특파원 / 조은아 기자
#공직사회#독학생 공무원#인수인계#인사이동#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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