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청계천이 복개되기 전까지 서울 청계천2가에는 광교라는 돌다리가 있었다. 광교의 정식 명칭은 광통교(廣通橋)로 1410년에 세워진 서울 최초의 돌다리였다. 길이13m, 폭 15m로 당시 서울에서 가장 큰 규모였고 5백48년 동안 다리역할을 했을 만큼 튼튼하고 정교했다.
서울시가 청계천을 복개하면서 다리 난간과 하천 양쪽에서 상판을 받치는 석축은 창경궁으로 옮겨 오랫동안 방치했고 교각은 그대로 두어 복개도로의 콘크리트 슬래브를 받치는 기둥으로 삼았다. 보물급 문화재가 이같은 천대속에 운명을 마쳤다.
광교는 처음부터 한많은 다리였다. 광교의 석축은 조선 태조 李成桂(이성계)가 총애했던 둘째부인 신덕왕후 康(강)씨의 묘지에 있던 병풍석이었다.
태조의 본처 소생인 李芳遠(이방원)은 1398년 계모 소생인 왕세자 방석 등 이복동생 2명을 죽이고 실권을 쥔다.
왕위에 오른 방원은 태조가 죽은 뒤 평소 미워했던 계모 강씨의 묘를 정동에서 정릉으로 이장하고 묘지 병풍석을 광교의 석축으로 쓰도록 했다. 광교를 건너는 사람들이 강씨의 무덤을 밟고 지나도록 한 것이다. 방영중인 TV드라마 「용의 눈물」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청계천 복개와 함께 광교는 사라졌으나 조흥은행이 지난 94년 광교네거리 본점앞에 4분의1 크기로 복원해 시민들이 슬픈 역사를 지닌 다리의 편린을 볼 수 있게 했다.
〈조병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