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충남]옛도심의 재발견/60년 전통 ‘기신양복점’

  • 입력 2007년 4월 19일 07시 01분


《양복은 1895년 단발령과 함께 우리나라에서도 입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양복은 고관대작의 전유물. 광복과 함께 입는 이가 늘어났지만 여전히 일부 ‘특별한 사람들’에 그쳤고, 그래서 양복은 사회적 신분을 나타내는 신분증과도 같았다. ‘의식주’라는 말이 있듯 의복을 먹는 음식이나 사는 곳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긴 것. 마카오 등 외국에서 몰래 들여온 옷감으로 양복을 해 입은 이를 ‘마카오 신사’라고 불렀던 것도 바로 이 시절이다.》

대전 동구 중동 60-13. 이른바 ‘역전통’이라 불리는 이곳에 맞춤 양복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 있다. 기신양복점. 60년이나 이어 온, 대전에서 가장 오래된 맞춤양복점으로 대전에서 살아온 50대 남자라면 한 번쯤은 가 보았거나 가 보고 싶던 곳이다.

그러나 20평 남짓한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초창기의 흑백 간판사진 외엔 반백 년을 훨씬 넘긴 흔적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그만큼 분위기가 깔끔하고 세련됐다.

기신양복점은 충남 부여에서 도시생활의 꿈을 안고 대전으로 올라온 김현갑(84) 씨가 1947년 지금의 한밭식당 맞은편 골목에 문을 열었다가 1958년 목 좋다는 지금의 장소로 옮겨왔다. 이후 1978년 차남인 근배(62) 씨가 이어받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70년대 전성기에는 한 달에 300벌의 주문이 쇄도했다. 한 벌 값은 3만 원 선. 지금 돈으로 치면 90만 원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그런데도 한때는 직원이 50명이 넘었다. 서울 명동에 분점을 운영했을 정도.

50명 중 재단사 서인석(69) 씨는 35년째 함께 일하고 있다. 그는 요즘 유행하는 ‘디자이너’라는 표현 대신 굳이 ‘재단사’로 불러 주기를 원한다. 그것이 더 숙련되고 전문적인 느낌을 준다고. 살림을 맡고 있는 홍석만(64) 씨도 기신과 인연을 맺은 지 30년이 됐다.

기신양복점에는 당시부터 지금까지 이 집 양복만을 고집하는 ‘마니아’들이 수두룩하다.

충북 옥천군이 연고인 이용희 국회부의장은 40년이 넘는 고객이다. 지금도 가끔 전화로 주문해 옷을 맞춰 입는다.

이인구 계룡건설 명예회장과 김주일 대전상공회의소 회장도 한결같은 단골이다. 고인이 된 동아연필 김정우 회장과 안세영 전 대전일보 사장도 김 씨가 잊지 못할 고객이다.

이곳에서 사용되는 투박한 사이즈 명세서는 지금도 옛 용어를 고집하고 있다.

‘진동(등길이)’ ‘총장(목에서 발목에 이르는 길이)’ ‘상의장(상의 길이)’ ‘상동(가슴둘레)’ ‘둔품(히프 크기)’ 등….

맞춤 양복의 스타일도 별도로 표기해 뒀다. 뒤트기, 옆트기, 통마이, ‘요꼬(바지의 직각 주머니)’ 등 다양하다.

김 씨는 “기성복이 일반화돼 찾는 이가 크게 줄었지만 변화에 뒤지지 않도록 항상 패션잡지를 보고 익힌다”며 “맞춤 양복에 매료돼 다시 찾는 고객을 위해 두 손과 두 팔이 다할 때까지 양복점을 이어 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기진 기자 doyocedonga.com

※ 대전 원도심 지역 중 신도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멋이나 맛, 재미로 소개할 만한 곳이 있으면 제보 바랍니다. 이 시리즈는 매주 수 목요일 게재됩니다. 메일: mhjee@donga.com 전화: 042-253-9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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