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심칼럼]「여론」이라는 함정

  • 입력 1997년 8월 29일 20시 23분


李仁濟(이인제)씨가 청와대에 들어가 金泳三(김영삼)대통령을 만나고 나와서 변한 것도 두려움도 없다는 말을 남기고 중국으로 날아갔다. 대통령 출마결심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다는 강력한 암시로 보인다. 아무리 겁주고 만류해도 나의 길을 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낸 말로도 들린다. 그렇다면 그에게 남겨진 선택은 하나, 신한국당을 떠나 독자출마하는 길밖에 없다. 그가 굳이 그 「가시밭길」을 택하려는 가장 큰 이유가 여론조사에 나타난 「인기」의 유혹 때문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 이인제씨의 미련 ▼ 젊고 당찬 이인제씨가 그의 모험이 불러올 정치적 상처를 짐작하지 못할 리 없다. 우리 헌정사상 최초라는 여당 대통령후보 자유경선에 필마단기로 뛰어들어 단숨에 2등을 거머쥔 이씨다. 그 과정에서 이씨는 경선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겠다고 거듭 다짐했다. 여당 사무총장은 그 다짐이 16차례나 된다고 상기시켰다. 그것이 그의 선택에 피할 수 없는 멍에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이씨의 변심은 이씨 개인에 대한 실망만이 아니라 우리 정치의 수준을 또 한단계 추락시키는 「배반」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이씨는 「여론의 무게」를 들먹이며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청와대가 바로 저긴데 여기서 돌아설 수 없지 않겠느냐는 심정일 것이다. 그 심정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8월21일의 뉴스플러스지 여론조사만 해도 이회창 김대중 김종필 조순 이인제 5자 대결의 경우 이인제씨가 23.7%로 2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위 김대중씨가 23.8%, 3위 이회창씨가 13.4%라니 이씨로서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씨는 이미 몇몇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30%대를 넘어 김대중씨를 5∼6% 앞지르며 1위를 질주하고 있다고 호언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여론조사에 「홀린」 사람이 이씨 혼자 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조순씨가 민주당에 입당해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 것도 여론조사에 나타난 일정한 지지율 때문일 것이다. 김대중씨가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이쪽 저쪽 호주머니에 잔뜩 집어넣고 「표정관리」에 들어간 것도 그로서는 처음 누려보는 「부동의 1위」라는 벅찬 희망 때문일 것이다. 이회창씨가 끊임없이 낙마설에 시달리고 김종필씨가 지지율 저조를 『수수께끼같다』며 태연한 척하는 것 역시 여론조사 때문이다. 그러나 여론조사가 야심에 찬 정치인들이 모든 것을 걸어도 될 만큼 신뢰할 수 있는 유일 최상의 행동준거가 될 수 있는가는 아무래도 의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표본의 크기나 대표성, 조사방법의 문제 등 때문에 여론조사 결과는 추세를 읽는 하나의 참고자료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알려져 있다. 더구나 인기조사와 같은 언론의 경마식(競馬式) 보도에서는 그 추세라는 것이 한 순간에 뒤집힐 수 있다는 것이 이회창씨의 아들 병역파문에서도 여실히 증명됐다. ▼ 확고한 비전이 먼저 ▼ 한마디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는 것이 여론이다. 진정한 지도자란 이 허망한 여론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어느날 갑자기 버림받고 허둥대는 지도자가 아니다. 여론의 물길을 바르게 돌려놓을 수 있는 지도자여야 한다. 드골은 모레 신문을 위해서 정책을 결정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프랑스가 추구해야 할 꿈과 비전을 제시했고 그 꿈과 비전에 가까워지도록 프랑스를 도왔다고 닉슨은 평가했다. 이인제씨는 『권력은 국민의 마음 속에 있다』고 했다. 그 마음을 잡는 것은 허망한 인기가 아니라 확고한 비전과 정책임을 이인제씨 뿐 아니라 모든 대통령 후보들이 꼭 알아야 한다. 대통령은 거저 줍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김종심(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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