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심 칼럼]「거지」의 언론자유

  • 입력 1998년 1월 9일 20시 16분


한때는 권력이 무서워서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했다. 이젠 국제통화기금(IMF)이 무서워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마음대로 못하는 처지가 됐다. 나라가 결딴 난 것이 IMF탓이 아닌 것은 더 말할 나위 없지만 결딴 난 나라가 깊은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혹 가혹한 IMF처방에도 일말의 책임이 있지 않을까 고개가 갸웃거려져도 말조차 꺼내기 어렵다. 어떤 외국신문이 호통친대로 ‘거지’에겐 선택권이 없다. ▼이유있는 불만도 토로못해▼ 아무리 IMF의 개혁 권유 방향이 옳아도 그렇다. ‘재협상’ 소리 한번 잘못 꺼냈다가 혼비백산한 김대중(金大中·DJ)차기대통령조차 기회만 있으면 ‘IMF협약 충실 이행’을 뇌고 또 뇐다. IMF협약을 지키기 위해 부실 금융기관을 문닫고 재벌을 개혁하고 정리해고를 하는 것이 우리가 고통스럽게 수행해야 할 개혁 방향과 일치한다고 누누이 설득한다. 설득할뿐 아니라 어서 빨리 개혁하지 않으면 당장 외화가 끊겨 국가부도사태에 빠진다고 절규한다. 외환사정이 다급하고 구조조정이 시급하다는 것은 봇물처럼 쏟아지는 국내외 소식들을 통해서도 다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벙어리 냉가슴 앓듯 이유있는 불만이라도 없는 척 체념하고 한발짝 더 나아가 IMF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자고 소리 높이 외치기도 한다. IMF 관리를 받는 국가현실이 수치스러워도 수치스럽다고 말하는 것도 금기(禁忌)다. 수치는 무슨 수치, 오히려 하늘이 준 호기(好機)라는 입막음이다. ‘국제적 룰’을 따라야 한다는 당당한 명분 앞에 못난 민족정서 따위는 쥐구멍이라도 찾아야 할 판이다. 이대로는 안된다, 나라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절박한 명제는 이제 누구도 알만큼은 안다. 지난날의 권위주의적 개발방식으로는 나라가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뿐 아니라 냉엄한 국제사회에서 낙오자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것도 대충 안다. 국민이 50년 헌정사상 처음으로 야당에 정권을 맡긴 것도 나라의 틀을 근본에서부터 바꿔야 한다는 소망을 표(票)에 담아 표현한 것이다. 말을 바꾸면 국민이 변혁의 대오(隊伍)에 앞장서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보인 것이다. 그 국민적 열망은 민주주의와 경제의 병행 발전을 제시하며 ‘자유시장주의의 호민관(護民官)’으로 나선 DJ에게 더 없는 원군이다. 거기에다 DJ는 IMF라는 강력한 외인부대의 지원까지 얻었다. 자율적 타율적 개혁 분위기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DJ의 행운이자 국가의 다행일 수 있다. DJ가 “어서 빨리”를 외치는 것도 이 기회를 허송하지 않고 최대로 활용하려는 현실성 있는 결단일 것이다. 그러나 개혁은 반드시 빨리 한다고 좋은 것은 아닐 것이다. 비록 불가피한 개혁이더라도 반발세력에 대한 충분한 설득과 합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옳다. 정부개혁 재벌개혁 고용개혁 모두 IMF요구가 아니더라도 나라를 살리기 위해 꼭 해내야 할 과업이지만 개혁을 위한 자발적 동의 없이 개인의 리더십만으로 밀어붙일 수는 없는 일이다. 밀어붙이기야말로 효율 만능의 권위주의 방식이다. ▼早期개혁 좋은것만 아니다▼ IMF가 요구한 고금리와 통화 재정긴축 등에 대해서도 끈질긴 ‘재협상’을 벌여볼만 하다. 현재 일부 재조정되고는 있으나 외국의 저명한 경제전문가들이 공공연하게 무리라고 지적한 처방을 당사자인 우리가 함구할 이유는 없다. 수출이나 실물경제 기반을 위협하는 금융구조조정 계획과 방법도 재조정이 필요하다. 기업이 다 쓰러지고 스태그플레이션이 장기화되면 개혁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호랑이 쫓는 곶감보다 무서운 IMF지만 할 말은 해야 한다. 비록 거부당할 ‘거지’의 언론자유일지라도. 김종심〈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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