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심 칼럼]北風공작의 종착역

  • 입력 1998년 3월 20일 20시 08분


난마처럼 얽히고 설켜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던 북풍(北風)의혹 파문이 가닥을 잡아가고 있는 것같다. 처음부터 흥분하지 않고 차분히 내면을 들여다봤다면 나라가 뒤집히는 듯한 소동을 겪지 않고도 의혹의 줄거리를 잡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정치권과 국가최고정보기관이 저처럼 많은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됐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느낌도 든다.

▼ 정치공작 뿌리뽑을 기회 ▼

정확한 진상은 수사가 더 진행돼봐야 알겠지만 본질은 의외로 단순한 듯하다. 줄기는 이렇다. 작년 대통령선거전 때 김대중(金大中)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한 안기부 주도 남북합작 북풍공작 시리즈가 진행됐다. 심지어 김대중후보측 등 정치권을 공작에 유인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새 정부 들어 공작 내막이 하나하나 드러나자 궁지에 몰린 안기부 전직 핵심들이 의도적으로 ‘협박용 괴문서’를 유출했다. 사건의 본질을 흐리고 수사에 혼선을 일으키려는 음모였다.

안기부 핵심세력이 노린 대로 ‘해외공작원 정보보고’라는 괴문서가 불러일으킨 혼란은 파괴적이었다. 대선 당시 3당 모두 북한과 내통했다는 핵폭탄과도 같은 내용이었다.

북풍이 흑풍(黑風·‘흑금성’바람)으로 바뀌면서 정치권이 벌집 쑤신 듯했다. 뒤늦게 문건을 검토한 여야 국회의원들은 문건 내용이 황당한 느낌이 드는 첩보묶음이라고 평가했다. 정치권에 들씌운 북한연계 의혹이 ‘과장’이라는 안도감을 보인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사건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남은 것은 안기부 전직 수뇌부가 주도한 북풍공작의 진상과 괴문서의 조작 유출 음모 여부 처리다. 정치권으로 확산된 의혹은 완전 해소됐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무리한 수사는 북한측의 역공작을 부를 우려가 있다.

불필요한 정쟁에 불을 붙여 국기(國基)를 흔들 수 있는 사안인 만큼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판단인 모양이다.

안기부의 악명높은 북풍공작은 이렇게 종말을 고할 운명이 됐다. 정권이 교체되지 않았다면 권력의 그늘에 숨었다가 언제 다시 살아날지 모를 북풍은 이제 영원히 사라지는 것이 좋다.

그 북풍의 종말과 함께 안기부의 정치공작도 다시는 이 땅에 발붙일 수 없게 해야 한다. 이것은 안기부가 정권의 하수인이 아니라 국가보위의 파수꾼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이나 같다.

국가안보와 체제보호를 책임져야 할 안기부가 정권안보와 기득권보호에 봉사하기 위해 적과 내통하고 거래한 북풍공작은 국가에 대한 반역행위다. 한심하고 어처구니없는 것은 국가최고정보기구를 그렇게 악용해온 구세력들이 정권교체로 신변이 불안해지자 부내 기밀문서까지 조작해 유출하며 구명도생(救命圖生)을 꾀했다는 점이다.

국가정보요원으로서의 소임을 희생적으로 수행해온 대다수 실무 정보요원들을 배신하고 국가안보기구 자체를 치명적으로 무력화시킨 가공할 행위다.

과거 군사독재시절 안기부는 육법(六法) 위에 군림하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일 말고는 못할 일이 없는 기관으로 비유되기도 했다. 이제 50년만의 정권교체를 맞아 안기부는 이 두렵고 음습한 이미지를 벗어던져야 한다. 뼈를 깎는 자기반성과 총체적 개혁이 뒤따라야 한다.

▼「국민의 안기부」거듭나야 ▼

지구상의 선진 민주국가 가운데 국가정보기관이 불법적인 국내 정치공작에 무차별 개입해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한 예는 없다.

안기부의 새 지도부는 엄정 신속한 북풍공작 수사와 처리를 통해 안기부의 추락한 위신을 되살려야 한다. 동시에 직제개편과 기능재정립으로 안기부를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보기구로 재출발시키겠다는 약속을 철저히 이행해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국민의 이해와 신망에 바탕한 새로운 국가정보기구가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김종심(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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